[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지난해 대통령 관저 선정 과정에서 풍수전문가가 공관을 다녀갔다는 정황이 나오면서 여야는 ‘무속’ 논란에 휩싸였다.
역술인 천공의 관저 선정 개입 의혹을 수사해온 서울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가 천공이 아닌 백재권 사이버한국외국어대학교 겸임교수가 지난해 3월 육군참모총장 공관을 다녀간 정황을 포착했다.
이에 국민의힘은 민주당의 주장과 달리 풍수지리학 전문가였다면서 민주당이 가짜뉴스를 생산했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반면 민주당은 대통령의 관저를 선언하는데 있어 풍수지리가의 조언을 들어 결정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면서 비판을 가했다.
이에 국민의힘은 과거 정권에서도 풍수지리학자의 의견을 들었다면서 반박을 했다.
흥선대원군 남연군 묘 이장
1845년 흥선군 이하응은 “가야산 가야사 석탑 자리에 선친 묏자리를 쓰면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온다”는 2대 천자지지(天子之地) 소리를 들었다.
이에 당시 경기도 연천에 있던 선친 남연군의 묘를 충청도 예산으로 이장했다. 이 과정에서 가야사를 불태우고 그 자리에 묘를 썼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하지만 가야사가 워낙 넓은 절이고, 그 절을 모두 불태우고 묏자리를 쓴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지적이 있다.
이런 이유로 이장할 당시에는 이미 가야사 자체가 사라졌고, 이에 묏자리로 쓴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남연군 묘 아래에는 불탄 흔적이 있기에 흥선대원군이 직접 불태웠는지 아니면 그 이전에 불타 없어지고 난 후에 이장을 했는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는 남연군 묘 이장과 관련해서 가야사를 흥선대원군이 불태웠다는 기록은 없다.
쇄국정책으로 일관
흥선대원군 시절은 쇄국정책으로 일관했다. 혹자는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 결국 조선을 멸망하게 했다는 비판을 가하고 있다. 혹자는 우리도 일본처럼 메이지유신 등을 통해 문호를 개방하고 외국 선진문물을 계속 받아들였다면 또 다른 역사가 전개됐을 것이라고 아쉬워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쇄국정책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평가도 있다. 당시 조선은 농업국가였다. 물론 조선후기에 접어들면서 상업이 발달했다고 하지만 서구유럽에 비하면 상당히 낙후된 상업활동이었다.
만약 그런 상황 속에서 문호개방을 했다면 조선에서 얻는 이득보다 그에 따라 부정적인 현상이 더 많이 발생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조선이 생산하는 제품은 ‘쌀’ 외에는 변변한 것이 없었다. 반면 서구유럽에서는 별의 별 생산품이 생산됐다. 그것을 맞교환을 한다고 하면 조선의 국부 유출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강화도조약 이후 쌀의 반출을 막기 위해 방곡령을 시행한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쇄국정책을 하면서 내부적으로 튼실을 기해야 했었는데 그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페르트 도굴 사건 이후
이런 쇄국정책이 ‘감정’적으로 변화한 것이 바로 오페르트 도굴 사건 이후이다. 독일인 오페르트가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다가 발각된 사건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 ‘감정’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병인양요 신미양요가 발생했다. 문제는 그로 인해 강화도를 지키는 군대와 물자가 많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이것을 충당하려면 몇 년 이상 걸리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1876년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일본에 의해 강제로 개방됐다.
실제로 2대 천하지지라는 소리를 들었는지 여부는 알 길이 없기 때문에 풍수지리가 맞아 떨어졌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