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이재명 대표의 체포동의안 가결에 대해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됐을 때와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고 밝혔다.
송 전 대표는 22일 BBS 라디오 ‘전영신의 아침저널’에서 설마 가결이 될까 그런 생각을 했다면서 이 대표 체포동의안 가결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에 대해 언급했다.
노무현 후보의 돌풍
노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은 2004년 3월 12일부터 2004년 5월 14일까지 진행된 사건이다. 노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 가결 사건은 단순하게 그 당시 즉 2004년 상황만 바라봐서는 안된다. 그것은 2002년 대선과도 연결된다.
김대정 정부 말엽, 차기 대선을 앞두고 당시 집권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은 동교동계가 당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87년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세력 즉, 86세대가 점차 정치권에 들어오면서 동교동계와 86세대 간의 갈등은 수면 아래에서 계속 꿈틀거렸다. 즉, 당시 86세대는 비주류로 언젠가는 당권을 장악하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2002년 대선 당시 이인제 후보와 노무현 후보가 격돌을 벌였고, 노무현 후보가 돌풍을 일으켰다. 그것은 완전국민경선제로 대선 후보를 선출하면서이다. 그 이전까지 당 지도부 소수가 차기 대권 후보를 선정하는 방식이었다면 이때부터 완전국민경선제로 국민경선을 통해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방식이 됐고, 노무현 후보가 대선 후보가 된 것이다.
하지만 당권을 장악했던 동교동계 입장에서는 노무현 후보가 못마땅하면서 그에 따라 계파 갈등이 상당했고, 경선을 통해 노무현 후보가 당당히 대선 후보가 됐지만 후보단일화협의회 등을 만들어서 계속해서 노무현 후보를 흔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열린우리당 지지 발언이 결국
노무현 대통령이 되면서 지역주의 정치 청산과 정치 개혁을 내걸었다. 이에 호남 지역구 의원 다수를 제외한 채 새로운 집권여당을 창당하게 됐다. 즉, 열린우리당을 창당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기존 민주당 주류로서는 두고 볼 수 없는 문제였다. 이 과정에서 동교동계와 열린우리당계열의 다툼이 발생하면서 이른바 ‘난닝구 사건’이 발생하게 됐다.
이런 가운데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2004년 총선을 앞두고 ‘개헌 저지선 논란’과 ‘열린우리당 지지 발언’을 하면서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는 논란이 생기면서 탄핵소추안이 발의가 됐고,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그리고 탄핵심판 절차를 밟게 됐고,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촛불집회가 열리는 등 사회적으로 혼란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헌재에서 기각
이후 헌법재판소에서 결국 탄핵소추를 기각하는 결정을 내렸다. 헌재의 심판은 법률적 심판보다는 정치적 심판에 가깝다는 평가가 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여론이 상당히 컸기 때문에 헌재로서도 기각 판결을 내리게 된 것이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에 대해 국민적 저항이 발발한 것은 의회가 행정부를 과도하게 흔들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노무현 대통령이 내건 지역주의 타파에 대해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즉, 전국적인 투표로 ㅃ보은 대통령을 특정 선거구에서 선출된 국회의원이 탄핵소추를 한다는 것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국민 사이에 팽배했다.
더욱이 당시 국회의원들에 대한 불신이 상당히 컸다. 그리고 그 불신은 새로운 세력이 국회의 주축세력이 돼야 한다는 열망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
탄핵을 주도했던 새천년민주당은 더욱 사면초가가 됐다. 왜냐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다.
결국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탄핵을 주도한 야당 세력을 사실상 심판을 하면서 헌재도 탄핵소추안을 기각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