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12월 8일 신해박해 발생
[역사속 오늘리뷰] 12월 8일 신해박해 발생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12.08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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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은 조선 최초 천주교에 대한 박해사건인 신해박해가 발생한 날이다.

전라도 선비 윤치중이 종교적 가르침을 지키고자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른 후 제사를 폐함으로써 사회적 파장이 일어났고, 당쟁으로 비화가 되면서 조선후기에 천주교가 박해되는 단초를 제공했다.

원래 정조는 천주교에 관대했지만 신해박해를 계기로 천주교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고, 서인은 천주교를 계기로 남인들을 공격하면서 남인의 몰락을 가져왔다.

학문에서 종교로

중국을 통해 천주교가 전래될 때는 서학이라고 부르면서 하나의 학문으로 취급했다.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겠다는 차원이었다. 하지만 18세기 들어오면서 조선 사대부는 남인을 중심으로 종교적 색채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정조대왕은 유학이 흥하면서 사교인 천주교는 소멸될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 하지만 천주교가 전파되면서 1785년 정조는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면서 금령을 내렸다.

여기에 1716년 교황 클레멘스 11세가 제사를 우상숭배라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조선에서도 조상제사 거부를 내세웠다.

이런 가운데 1783년(정조 7년) 이승훈 부친이 사절단에 포함되면서 남인들은 이승훈에게 사절단에 동행하도록 설득했다. 그리고 천주교 서적을 많이 구해올 것을 부탁했다. 1784년 이승훈은 정기모임을 만들고 교리를 학습했지만 발각되면서 모임은 와해됐다.

윤지충의 제사거부

이런 가운데 전라도 진산군(현 충남 금산)에 사는 선비 윤지충이 진사에 합격한 후 상경했지만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낙향해 조용히 살고 있었다.

문제는 1791년 여름 모친상을 치를 당시 유교식 상장의 예를 사용하지 않고 조문도 받지 않고 로마 카톨릭 예식으로 장례를 진행했다. 이에 종친들이 분노했다. 여기에 외사촌인 권상연은 제사를 폐지하고 자신의 집안에 모시던 신주를 불태워 땅에 묻어버렸다.

이 같은 소식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당쟁으로 부화됐다. 윤지충과 권상연이 남인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서인이 남인을 공격했다.

결국 정조는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윤지충은 전라감영에서 심문을 받았다. 윤지충은 신주를 모시지 않은 서민들도 많다면서 천주교를 충실히 신봉하는 것은 결코 국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고 항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효를 부정하는 것이고, 이는 나라의 어버이인 왕에 대한 충을 부정하는 행위라면서 강상죄를 물었다.

원래 정조대왕은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확대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서인은 사안의 확대를 원했고, 결국 박해로 이어졌다.

그리고 신해박해는 신유박해로 이어지고, 조선말의 천주교 박해로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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