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중석불 사건이라고 하면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1952년 6월 정부가 중석불을 외국에 팔아 벌어들인 달러를 민간 기업체에 불하하여 밀가루와 비료를 수입하게 하고, 이를 농민에게 비싼 값으로 팔아 피해를 입힌 사건을 말한다.
또 다른 하나는 5.16 군사반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960년 장면 정권 내부에서 소장파와 노장파 사이의 싸움을 말한다.
중석불은 ‘텅스텐’으로 우리나라에서만 생산되는 광물질로 당시 우리나라 수출의 60%를 담당할 정도로 수출 주력 상품이었다.
장면 정권의 치명적 약점으로
장면 정권의 소장파는 이철숭 의원을 중심으로 신풍회를 조직했다. 신풍회 소속에는 함종빈 의원이 있었다. 함 의원이 중석 사건을 공개적으로 폭로하고 나선 것이다.
함 의원이 폭로한 내용은 중석 수출계약을 위한 입찰에 부정이 있었는 것이고, 오이영 장관과 문창준 중석 사장 사이에 모종의 추문이 있었다는 것이고, 입찰 부정에는 100만 달러의 커미션뿐만 아니라 계약을 해준 대가로 통조림 공장과 냉동 공장 설치를 약속받았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정치자금 스캔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김영삼 당시 의원과 이상돈 의원이 중심이 돼 ‘중석사건 진상조사단’을 꾸렸다. 그야말로 장면 정권의 명운이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진상조사 결과
국회조사단이 밝힌 내용에는 일본 용공(容共) 회사로 알려진 ‘동경식품’과 불리한 조건으로 중석수출계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4.19혁명으로 탄생한 장면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이 불가피했다. 당시 반공을 국시로 했다는 점에서도 더욱 큰 타격이 예고됐다.
여기에 집권당의 소장파와 노장파의 갈등으로 인해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에 민주당에 대한 세간의 비판이 이어졌다.
중석불 사건은 민주당 구파와 신파의 연립내각이 이뤄졌지만 ‘아슬아슬한 동거’가 이뤄진 상태에서 폭로가 된 것이기 때문에 결국 1961년 1월 끝장이 났다. 이로써 장면 내각은 불안한 상태가 됐다.
5.16 군사반란의 단초
중석불 사건이 민주당 구파와 신파의 연립정권을 무너뜨리게 만들었고, 민주당 신파로 이뤄진 장면 내각이 출현하게 되면서 5.16 군사반란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평가가 있다.
5.16 군사반란 당시 국민들이나 진보 인사들조차 박정희 군부의 쿠데타를 지지하고 나선 것도 중석불 사건으로 인한 장면 내각에 대한 염증이 심해졌기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다.
자유당 정권이 싫어서 4.19 혁명을 일으켰지만 장면 정부의 중석불 사건을 계기로 ‘장면 정부도 자유당 정부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을 국민들이 하게 되면서 5.16 군사반란을 지지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