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12월 13일 장진호 전투 종료
[역사속 오늘리뷰] 12월 13일 장진호 전투 종료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12.13 0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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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12일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평화의광장에서 열린 제73주년 장진호 전투 기념행사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2023년 10월 12일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평화의광장에서 열린 제73주년 장진호 전투 기념행사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50년 12월 13일은 한국전쟁 시기 장진호 전투가 종료된 날이다. 장진호 전투는 UN군과 국군이 중공군을 맞이해 전투를 벌인 것으로 미국 역사상 ‘가장 추운 전투’로 기록된다.

장진호 전투에서 비록 유엔군과 국군이 철수를 해야 했지만 중공군의 인명 피해도 막심했기 때문에 38선을 기점으로 남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공방을 벌이게 됐고, 휴전 논의가 이뤄지게 됐다. 아울러 흥남철수작전이 이뤄지게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만큼 미국 역사상 가장 뼈 아픈 전투이고, 소위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펼쳤다고 했을 때가 바로 ‘장진호 전투’를 지칭한다.

38선 넘어 북진

1950년 6월 25일 북괴가 남침을 해오자 대한민국 정부는 부산을 임시수도로 삼고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리고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서울을 수복한 후 10월 1일 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진을 했다.

다급한 김일성은 중공에 SOS를 보냈고, 이에 중공이 한국전쟁에 참전을 하게 됐다. 미국 해병대 창설 이후 가장 치열했고, ‘포위섬멸작전’에 빠진 전투이다.

미군은 그동안 병력 손실을 본 전투 사례가 있지만 상대의 잘 짜여진 시나리오에 말려들어 수만명 단위의 전투력 소멸 상황에 빠진 전투는 이 전투가 처음이면서 마지막 전투였다.

장진호 전투 기간에 서부전선의 미 8군 지역에 있던 미 육군 2사단은 군우리에서 중공군의 포위섬멸작전에 빠져 큰 피해를 입었다.

포위섬멸작전에 빠진 이유

당시 유엔군은 우수한 화력을 갖고 있었다. 중공군은 1개 포병대만 있었을 뿐 중화기도 없었고, 오로지 소총과 박격포 등이 있었다. 반면 미군은 중화기와 항공지원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유엔군이 승리를 할 것이라고 점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공군은 산악지형을 통한 기습적 우회, 포위공격을 했다. 반면 미군은 산악지형에서의 전투 경험이 부족했다. 더욱이 보급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했다는 점도 유엔군이 패착이었다.

미 해병대 전투기록에는 철도가 많이 언급됐다. 그만큼 철도의 부존재가 미국으로서는 뼈 아픈 대목이었던 것이다.

함흥에서 진흥리로 이르는 주 보급로는 너무 좁고 험난했다. 이에 10군단 73공병대대와 185공병대대가 투입되어 일방통행을 양방통행으로 넓혔고 북한군이 후퇴하며 교량과 도로를 폭파한 상태라 교량 20개와 우회로를 새로 설치해야만 했다.

미군의 가장 큰 적은 중공군이 아니라 추위

무엇보다 미군의 가장 큰 적은 중공군이 아니라 추위였다. 미국으로서는 가장 추운 전투로 기록돼 있다. 그것은 시베리아의 매서운 추위보다 더한 추위였다는 것이다.

미군이 한국전쟁에 참전을 했을 당시에는 여름이었다. 한 미군의 기록에 의하면 ‘이같은 무더위는 자신이 처음 겪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불과 몇 개월도 안돼서 매서운 추위를 경험해야 했다.

개마고원 등지에서의 추위는 그야말로 시베리아보다 더 혹독한 추위이다. 그 추위를 경험 못한 미군으로서는 추위에 당황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일각에서는 장진호 전투를 최소 3~4월에 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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