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6월 4일 천안문 6.4 항쟁
[역사속 오늘리뷰] 6월 4일 천안문 6.4 항쟁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4.06.04 08: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89년 6월 4일은 천안문 6.4 항쟁이 일어난 날이다. 중국 천안문 광장에서 4월 15일 대학생들과 시민 주도로 시작된 항쟁이며 6월 4일 중국 정부의 군대가 전차를 앞세워 유혈 진압한 항쟁이다.

흔히 ‘천안문 사태’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아직도 천안문 6.4 항쟁에 대해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있다.

문화대혁명 후유증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했지만 문화대혁명 후유증은 계속 이어져왔다. 그리고 덩샤오핑이 결국 대권을 장악하면서 개혁개방을 추진했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를 공산주의에 도입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관료들의 부패가 늘어났고, 초유의 인플레이션과 실업문제가 가중됐다.

또한 지방정부와 기업에 자율권이 부여됐지만 ‘꽌시’라고 불리는 부정부패가 판을 쳤다. 그러면서 도농격차와 빈부격차가 벌어졌다.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 그동안의 철권통치가 완화되고 사회적 분위기가 자유롭게 되면서 억울렀던 분위기에 대한 반작용이 발생했다. 그러자 덩샤오핑이 강경노선으로 돌아섰다. 이에 웬만한 범죄에 대해서 모조리 사형선고를 내렸다. 문제는 이런 ‘엄타’운동이 부정부패의 근본을 해결해주지 못했다.

여기에 당은 개혁파와 보수파로 나뉘어 갈등을 보였고, 중국 인민들은 일당독재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카나리아 작전

4월 15일부터 시작된 천안문 시위는 6월 4일이 되자 절정에 이르렀고, 결국 중국 정부는 전차들을 동원해서 시위대를 강제적으로 해산했다. 그 과정에서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베이징은 그야말로 죽음의 도시가 됐다. 시민들은 군인들에게 짓밟히고 탱크와 장갑차가 지나가면서 살아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천안문 6.4항쟁에서 시위대는 진압됐고, 해산됐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중국 정부는 시위 주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수배작전에 들어갔다. 원래 중국 정부는 시위 주동자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했지만 일주일만에 약속을 번복한 것이다.

이에 시위 주동자 일부는 외부 세력의 도움을 받아서 국외로 망명했다. 이들을 돕기 위한 작전이 ‘카나리아 작전’이다.

서방 국가들이나 대만 등에서 이들 시위주동자에게 비자를 발급해주거나 비행기나 배 등 수송수단을 제공해주기도 했다.

중국 정부의 대응

중국은 천안문 6.4 항쟁 이후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더욱 옥죄는 작업을 했다. 개혁개방으로 인해 학문과 예술의 자유 움직임이 있었지만 이 사건 이후 대학생의 숫자를 대폭 감축시켰으며, 대학교에서 군사훈련이나 사상교육을 했다.

출판물에 대한 탄압도 이어지면서 반정부 유포 혐의를 받는 신문과 잡지는 모두 폐간 처분했다. 문화대혁명이 중국 내에 있는 문화재를 파괴하는 등 하드웨어를 파괴했다면 천안문 6.4 항쟁 이후 출판과 예술 그리고 학문에 대한 탄압은 중국의 소프트 파워를 파괴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중국은 과거 중국 문화와 완전히 단절됐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해외로 망명했던 시위주동자들이 21세기 들어서 중국의 개혁개방을 하자 다시 모국으로 돌아가서 기술, 과학 발전에 이바지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줬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