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503년 6월 13일은 조선 연산군 시대로 연은분리법이 시행됐다. 연은분리법은 납이 포함된 은광석에서 녹는점의 차이를 이용해 납만 산화시키고 은을 골라내는 기술이다.
조선에서 개발한 기술이지만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일본이 전세계 은 생산량의 3위 국가가 됐다.
최초기록은 연산군일기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9년 5월 18일(1503년 6월 13일) 김감불(金甘佛)과 김검동(金儉同)이라는 사람이 개발해 시연했다고 기록돼 있다. 연철을 화로에 녹여 은을 골라내는 방법을 사용했다. 연산군일기에 기록될 정도라면 연산군이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은분리법 시연을 본 연산군은 “이제 은을 넉넉히 쓸 수 있다”면서 흡족해했고, 함경도 단천에서 연은분리법으로 은을 캐도록 연산군이 지시했다.
하지만 중종반정 이후 중종은 연산군 때 사치풍조 척결을 내세우면서 은광 채굴을 금지하고 연은분리법도 금지하게 됐다.
게다가 중국에서 공납으로 은을 요구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그에 따라 연은분리법을 금지했다. 또한 은을 채굴하는 것이 백성들에게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금지시켰다.
일본으로 넘어가
일본 긴잔큐키(銀山日記)에는 1526년 하카타 출신 상인인 가미야 주테이(神屋寿禎)가 은광을 발견했으며, 조선에서 경수(慶寿, 게이주)와 종단(宗丹, 소탄)이라는 두 기술자를 초청, 이들로부터 연은분리법 기술을 전래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면서 이와미 은광이 크게 성공했고, 1533년 다른 은광들에게까지 기술이 전래됐고, 1562년에는 모리(毛利) 가에 의해 은광의 지배권이 확립됐다. 포르투갈 상인들을 통해 은광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갔고, 은광은 다이묘들의 전략적 중심지가 됐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암살로 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시대를 통일하고, 일본의 관백(關白)이 되어 은광을 모리 가와 공동 관리하게 됐으며 도요토미 사후에는 자연스럽게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그 권리가 넘어갔다.
17세기에 이르러 이와미 은광의 은 산출량은 연 수십 톤에 달했으며, 일본의 은본위제도 확립을 하게 했으며, 17세기 세계 3위의 은 생산국가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