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50년 6월 27일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이 시작된 날이다. 당시 헌병대 6사단 상사 김만식의 증언에 따르면 이날 헌병사령부를 통해 대통령 특명으로 분대장급 이상 지휘관은 명령에 불복하는 부대원을 사형시키고 남로당 계열 및 보도연맹 관계자들을 처형하라는 무전지시를 직접 받았다.
보도연맹이란 6.25 전쟁 초기 대한민국 이남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이다. 대략 6만명에서 20만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도연맹에 소속돼 있다는 이유로 민간인을 학살한 것이다. 당시 공무원들은 보도연맹 가입 실적을 올리기 위해 공산주의자 출신 아닌 평범한 사람까지 가입시켰기 때문이다.
보도연맹이란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6월 5일 좌익 계열 전향자로 구성된 반공단체 조직이다.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이 시행되면서 사상전향을 시켜 보호하자는 취지에서 만든 조직이다. 그것은 일제강점기 친일 전향 단체를 본떠 만든 조직이다.
가입자수가 1949년 30만명에 달했고, 서울에만 2만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실제로는 공무원들의 실적주의 때문에 가입을 강요받은 경우가 많다.
전쟁이 발발된 이후 보도연맹원 대다수는 정부의 지시를 잘 따랐다고 한다. 실제로 보도연맹원이 정부에 충성을 했다는 자료가 남아있기도 한다.
다만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을 지지하는 행동을 한 것도 사실이다. 이에 이승만 정부가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 수 있다는 이유로 학살할 결심을 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27일 헌병사령부로부터 보도연맹 학살을 군인들이 지시를 받게 된다. 이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서울을 탈출하고 부산으로 피난 갔는데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이 조선인문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부역 행위에 협조하거나 의용군에 입대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그 빨갱이 놈들은 역시 배신자였어”라고 외쳤다는 후문이 있다.
상부로붵 명령이 하달되면서 보도연맹원들은 모조리 경찰서로 구금됐다. 그러면서 각 고을의 야산 등에서 총살이 진행됐다. 실제로 ‘골로 간다’는 말이 보도연맹 학살사건 때문에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보도연맹 학살이 중지된 이유는
보도연맹 학살이 1950년 하반기에 중지됐다. 그것은 미국의 압력도 아니고 정부의 변심도 아니었다. 그것은 중공군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승만 정부에서는 보도연맹 사건은 쉬쉬했다. 그러나 4.19 혁명 직후 장면 내각이 출범하면서 보도연맹 학살사건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이에 ‘양민학살 사건의 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하면서 실태조사를 벌였다. 다만 1961년 5.16 쿠데타로 유야무야 됐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대에도 유족들은 ‘요시찰 대상’으로 지목되면서 감시하고 연좌제를 적용해왔다. 1990년대 들어서서 보도연맹 학살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결국 2008년 1월 24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울산 국민 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한 과거 국가권력의 불법 행위에 대해서 사과했다. 그리고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다룬 영화가 ‘태극기 휘날리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