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영조 금주령
[역사속 경제리뷰] 영조 금주령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4.07.02 13: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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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조선시대 영조의 금주령은 유명하다. 하지만 영조 본인은 폭음을 한 기록이 있다. 영조 31년(1755년) 5월 6일 영조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소론을 심문하다 화가 나서 폭음을 했고, 주사를 부렸다는 기록이다.

문제는 그해 가을 흉년이 들면서 금주령을 선언했다. 그러면서 역사상 가장 강력한 금주령을 시행하게 된다.

그것은 종묘제례 제사에 쓰이는 술도 금지됐다. 금주령을 위반한 사람은 유배를 보냈고, 술을 마신 선비는 과거시험의 자격을 박탈했다. 중인이나 서얼은 수군으로 보냈고, 서민과 천민은 노비가 됐다.

사도세자와의 갈등

금주령이 시행되면서 정치적 파장은 엉뚱한 곳으로 치달았다. 그것은 사도세자와의 갈등이 일어난 것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금주령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영조는 금주를 나라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도세자가 이를 어기고 술을 마셨기 때문에 갈등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금주령을 어겨서 죽음으로 내몰린 사람은 비단 사도세자만은 아니었다. 함경도 북청 병마절도사 윤구연이 술을 마셨다는 혐의로 숭례문에서 참수됐다. 그리고 그를 두둔했던 정승들도 파직됐다.

영조는 더 나아가 한 집이라도 술을 마시는 것이 적발되면 이웃의 세 집까지 함께 처벌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느닷없이 금주령 해제

그런데 영조 43년 1767년 영조는 갑작스럽게 금주령을 해제했다. 왜 금주령을 해제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다만 금주령을 해제했다고 해서 마음 놓고 술을 마실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금주령이 해제됐다고 해도 밀주업자가 붙잡혀 왔는데 밀주업자가 ‘식초’라고 우겼다. 이에 신하들에게 맛을 보게 했는데 술이라고 정직하게 대답한 사람은 파직시켰다.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하자 금주령을 바로 풀었다. 정조가 애주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한양에 술집이 많이 들어섰고, 사회적 문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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