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94년 7월 8일은 북한 지도자 김일성이 사망한 날이다. 김일성은 그해 7월 25일 김영삼 당시 우리나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었다. 이에 묘향산에 위치한 개인 특각인 ‘향산특각’에 머물면서 회담 준비를 했으나 심근경색으로 쓰러졌고, 사망했다.
당시 북한 주민들은 세상이 무너질 듯 울부짖었다. 김정일이 권력 승계를 하면서 당초 예정됐던 남북정상회담이 취소됐다.
문제는 북한은 김일성이 사망한 것과 맞물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이에 북한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김일성 사망은 엄청난 사건이 됐다.
김영삼과의 남북정상회담 앞두고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0 탈퇴 이름장을 놓으면서 한반도가 경색됐다. 이에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특사로 파견되면서 북한 측에 경수로 제공을 약속했고, 핵 프로그램 중단과 NPT 탈퇴 철회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 김영삼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과 정상회담까지 성사된 상태였다.
그해 7월 25일 역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앞두면서 김일성은 회담 장소였던 묘향산을 찾아 회담 준비에 일일이 관여했다. 김일성으로서도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에게 남북정상회담은 새로운 돌파구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무엇보다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된다면 북한 주민들의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이에 라진·선봉경제특구를 전면 개방 등의 계획을 짜놓았고, 자신도 서울에 가서 대한민국 국민을 상대로 연설하겠다는 계획도 있었다.
이에 7월 7일 묘향산 특각을 둘러보는 도중 쓰러졌꼬 그 다음날 새벽 2시 심근경색으로 82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7월 9일 조선중앙텔레비전은 김일성 사망을 공표했다.
정권 유지 김정일 선택
김일성은 과거 동지들과 함께 하고 싶다면서 자신이 죽으면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치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김정일은 시신을 미라화해서 주석궁을 ‘금수산기념궁전’으로 탈바꿈했다. 김일성 시신 미라화는 러시아 기술진에 의해 이뤄졌다.
당연히 북한 주민들은 대성통곡했다. 김일성이 북한에서 정권을 획득하고 난 후 우상화가 이뤄졌기 때문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는 점이다. 대규모 아사자가 속출하기 시작하면서 김일성의 사망은 북한 주민들에게는 의지할 곳이 사라지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김정일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이 사망하자 우리나라는 전군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북한 역시 ‘준전시태세’로 전환했다.
다만 김대중 정부 들어서면서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고, 김정일과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