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탈라스 전투
[역사속 경제리뷰] 탈라스 전투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4.07.26 1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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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의 일대기를 그린 연극./사진=연합뉴스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의 일대기를 그린 연극./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탈라스 전투는 751년 중앙아시아 탈라스 강 근처에 일어났던 당나라와 이슬람제국(아바스 왕조)와의 전투를 말한다.

탈라스 전투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은데 경제역사에서 탈라스 전투가 차지하는 의미가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중국의 서역팽창 저지와 중국의 간접적 영향권에 있던 중앙아시아 지역의 이슬람화가 가속화되면서 오늘날 실크로드 이미지가 아라비아 상인들이 장악한 것과 같은 이미지가 고착화됐다.

또한 중국이 독점했던 종이를 제조하는 기술인 제지술이 이슬람 문명으로 전파돼 유럽으로 퍼지게 된 전투이다.

아울러 탈라스 전투에 참전했던 돌궐이 아바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셀주크투르크, 오스만투르크 등의 제국을 만들면서 서구유럽의 대항해시대를 열게 만들었다.

그리고 탈라스 전투에서 당나라 군대의 장수는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 장군이다.

당나라 서진정책과 이슬람제국의 충돌

당시 당나라는 서진정책을 꾸준하게 하면서 지금의 신장 지역에 한족을 이주시키면서 중앙아시아에 영향력을 미치려고 했다. 이에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를 안서도호부 부도호 겸 사진 도지병마사 직책을 맡겼다.

그리고 서역 서쪽에 있는 소그디아나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750년 석국은 자진항복하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하지만 고선지 장군은 석국의 항복을 받아주지 않고 힘으로 밀어붙여서 수많은 재화를 약탈했다. 또한 당나라 조정은 석국 왕을 처형했다. 그러자 서역의 작은 나라들은 당나라는 항복해도 죽이는 못 믿을 나라라고 판단했고, 석국 왕의 아들 역시 이슬람 세력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아바스 왕조 역시 중국과의 무역교역로인 실크로드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동진을 하게 됐고, 이에 탈라스 전투가 발생했다. 결론적으로 탈라스 전투에서 당나라가 패배했다.

탈라스 전투 이후

당시 아바스 왕조는 돌궐 제국 해체 이후 방황하든 튀르키예 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그러면서 튀르크 인들이 아바스 왕조에 대거 유입됐다. 그리고 튀르키예 인들이 아바스 왕조의 또 다른 세력이 되면서 아바스 왕조가 무너지게 되고 셀주크투르크가 세워졌다.

셀주크투르크는 중앙아시아를 장악하면서 이스라엘과 이집트까지 점령하게 됐고, 예루살렘이 점령됐다는 소식을 들은 유럽사회는 십자군을 결성해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다. 십자군 전쟁은 중세유럽의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냈다.

셀주크투르크 이후 튀르키예 인들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세운 후 동로마제국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지중해 연안을 장악하자 서유럽은 대항해시대를 맞이하면서 아메리카, 아시아로 이어지는 항로를 개척하게 됐고, 세계사를 뒤바꿔 놓았다.

만약 탈라스 전투에서 당나라가 승리를 했다면 아바스 왕조에 고용됐던 수많은 튀르키예 병사들이 사망했을 것이고, 튀르키예 인들이 아바스 왕조의 구성원이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중앙아시아 입장에서는 원래 불교를 믿었지만 탈라스 전투에서 아바스 왕조가 승리를 하면서 이들 중앙아시아 국가는 급격하게 이슬람으로 개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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