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18년 8월 16일은 일본제국주의가 식민지 조선에 곡물수용령을 발동한 날이다. 곡물수용령은 조선인들이 거둬들인 곡식을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강제로 빼엇가서, 일본으로 실어 보내는 제도이다. 이로 인해 당시 굶어죽은 사람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곡 가격의 안정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결국 산민증식계획으로 이어지면서 조선의 수탈은 더욱 거세졌다.
1차 세계대전 발발하면서
1910년 일본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했다. 그런데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제국주의는 연합국 편에 섰다.
그러면서 곡물 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했다. 1917년 1월 쌀 1석 당 16원이었지만 1918년 1월 24원으로 급등했다. 전쟁으로 인해 군량미가 늘어나면서 그에 따라 쌀 가격이 상승한 것이다.
이에 일본정부는 1918년 4월 증권거래소에 대해 거래정부를 명하고 임시외미관리부를 설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쌀 가격이 안정이 되지 않으면서 8월 16일 곡물수용령을 발동한 것이다.
그러면서 미곡 가격을 안정시키려고 했지만 미곡 가격의 상승은 계속 이어졌고, 미곡 가격이 상승하고, 조선땅에는 곡물수용령으로 인해 강제 공출을 당하면서 조선 백성들의 민심은 흉흉해졌고, 결국 1919년 3.1 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연합국 승리로 이어지자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 승리로 이어지자 이번에는 곡물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1920년 3월 1석당 54원으로 치솟았던 쌀 가격이 그해 말에는 1석당 26원으로 떨어졌다. 1921년에도 쌀 가격의 하락이 계속 이어졌다.
결국 1920년 일본은 산미증식계획을 세우면서 조선을 쌀 생산기지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면서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쌀 수탈이 이어졌다.
일본정부는 조선쌀의 일본 이출이 심하게 이뤄지면서 군산항에는 쌀이 산(山)을 이룰 정도였다. 그리고 전국 곳곳에는 쌀 창고가 많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