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39년 8월 23일은 나치 독일과 소련이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날이다. 서명자는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이다. 이에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Molotov–Ribbentrop Pact)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결정적 문건이다. 하지만 현재 원본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나치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물론 소련이 연합군에 합류하면서 승전국이 됐지만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책임을 면할 길은 없다.
히틀러가 등장하면서
사실 독일과 소련은 매우 사이가 좋은 우방국이었다. 그것은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어서 국제적 왕따였고, 소련 역시 공산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왕따를 당했기 때문이다.
물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소련이 싸웠지만 독일은 독일제국의 문제였고, 소련 역시 러시아 제국 때 일이었다. 따라서 둘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폴란드’가 존재했다.
그런 둘의 관계가 틀어지게 된 것은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등장하면서이다. 히틀러가 ‘반공’을 외치면서 소련과의 관계가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나치 독일과 소련은 서로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영국과 프랑스는 체코슬로바키아를 버리는 대신 독일과 화평을 하는 뮌헨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면서 소련은 서구유럽에 대한 배신감이 상당했다.
하지만 더 큰 위협은 히틀러였다. 히틀러는 집권 당시부터 소련을 비난했으며 소련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에 소련 외무부 장관 막심 리트비노프는 영국-프랑스와 소련-체코슬로바키아가 연합해 독일을 포위하는 구상을 했다.
영국-프랑스와 협력하려던 소련
이에 소련은 영국과 프랑스에게 독일의 공격을 받을 경우 전쟁에 돌입한다는 동맹 관계를 제안했다. 하지만 영국은 별다른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예비회담을 열자고만 했다. 그러면서 영국과 프랑스 사절단이 소련에 도착했는데 비행기가 아닌 여객선을 타고 온 것이다. 소련 입장에서는 영국과 프랑스를 신뢰하지 못하게 만든 결정적 이유가 됐다.
8월 12일 모스크바에서 겨우 협상이 시작됐지만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소련은 영국과 프랑스가 소련과 독일의 전쟁일 의도적으로 부추기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소련은 영국과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맺을 바에는 나치 독일과 협상해서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영국-프랑스와는 다른 태도 보인 독일
나치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와는 다른 태도를 보였다. 협상단이 비행기를 타고 곧바로 모스크바로 날아갔기 때문이다. 8월 23일 모스크바에 도착했지만 의외로 협상이 잘돼서 쉽게 합의했다.
영국-프랑스와의 협상이 질질 끌었다면 단 하루도 안돼서 합의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속전속결이었다. 그렇게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스탈린은 “히틀러 총통에게 전해주시오. 나는 이 협약을 끝까지 지키겠다고”라고 맹세했다.
하지만 불가침 조약은 끝까지 지켜지지 않았고, 독소전쟁으로 이어졌고, 나치 독일은 패망하고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