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19년 9월 2일은 강우규 의사가 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던져 암살을 시도했던 날이다. 끝내 미수에 그쳤으며 사형 선고를 받았다. 독립운동가로서는 상당한 고령이었다.
노인동맹단 가입
강우규 의사는 1855년 평안도에서 빈농가의 막내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면서 친형에게 한학과 한의학을 익혀 생활의 방편으로 삼았다.
개항이 되자 개신교 장로회에 입교를 하게 됐고, 함경도 홍원현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면서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이에 사립학교와 교회를 세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이에 청나라 길림성에 망명해서 애국지사를 만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강우규는 광동학교를 세웠고, 군자금 조달을 주력하기 위해 박은식이 조직한 ‘노인동맹단’에 가입했다.
3.1 만세운동 일어나자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5월 말 연해주에서 새로운 조선총독이 부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에 강우규 의사는 제3대 조선총독을 처단해야한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이에 주철로 만든 영국식 수류탄에 대한 사용법을 듣고 1개를 구입했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산역으로 나아갔다. 당시 입출국하는 사람들을 검문했지만 강우규 의사는 65세 노인이었기 때문에 걸리지 않았다.
경성부에 도착한 강우규 의사는 9월 2일 신임 조선총독이 경성부에 부임한다는 내용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됐고, 거사 당일 오후 5시 신임 총독 일행이 기차에 내려 귀빈실을 거쳐 전방 출입구로 나왔고, 이에 강우규 의사는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마부 앞 약 7보 떨어진 장소에 떨어져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파편이 사방에 튀어 흩어졌다. 여러 개의 파편은 사이토 총독이 탄 마차에 충돌했고, 그중 한 개의 파편이 마차의 후방을 관통했으나 사이토 총독의 허리 부분 검대(劍帶)를 손상하는 것에 그쳤다. 사방으로 파편이 튀면서 37명에 중경상을 입혔다.
강우규 의사는 혼란한 틈을 노려서 현장을 빠져나와 숨었지만 결국 친일 경찰에 발각돼서 체포됐다.
그 다음해 2월 25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11월 29일 강우규 의사는 65세의 일기로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순국했다.
2011년 9월 옛 서울역 광장에 강우규 의사 동상이 건립됐다. 하지만 강우규 의사가 의거를 했던 장소는 현재 장소는 아니다. 1919년 당시는 건평 15평 수준의 목재 가건물이고, 옛 서울역사는 1922년 착공돼 1925년 준공된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