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형제복지원 피해자 김대우씨가 지난 8일 향년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정부가 손해배상에 항소하면서 형제복지원 피해자가 국가배상을 기다리던 중 사망한 부산 첫 번째 사례다.
형제복지원사건피해생존자(실종자·유가족)모임에 따르면 식도암을 앓던 김 씨가 이날 오전 6시30분께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최근 몸무게가 72㎏에서 46㎏까지 급속히 빠졌던 그는 병원 입·퇴원을 반복하다 끝내 숨을 거둔 것이다. 김 씨는 10살 때 경찰에 의해 처음 형제복지원에 입소해 입·출소를 세 차례 반복했고, 다리 괴사 등의 후유증을 앓았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형제복지원 사건은 1975년~1987년까지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던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일어난 인권유린, 국가폭력, 학살 사건이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의 묵인 및 방조 또는 협력 하에 벌어진 참극이었다.
12년간 사망한 피해자가 최소 513명으로 알려졌고, 시체는 암매장 또는 해부용으로 팔렸기 때문에 정확히 몇 명이 사망했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2022년 8월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에 따르면 공식 사망자가 657명이다.
수천명의 원생이었지만 70%는 일반인으로 형제복지원 직원들에 의해 납치, 구금된 사람들이다. 납치는 부산시청과 부산 경찰이 적극 협조했기 때문에 원생들은 탈출해도 공권력에 의해 다시 잡혔다.
원장과 직원 4명은 체포돼 특수감금죄 혐의 등으로 기소됐지만 윗선의 지시로 살인죄는 기소되지 않았다. 전두환은 반정부 시위로 번질 것을 두려워해 2년만에 석방됐고, 원장은 2011년 치매를 앓다가 2016년 사망했다.
박정희 정부 부랑아 단속 발표 후
형제복지원 원장은 그 이전에도 복지원을 유아보호시설을 운영해왔다. 그러다가 1971년 부랑아 보호시설로 변경했고, 박정희 정부가 대대적인 부랑아 단속을 내용으로 하는 1975년 내무부훈련 제410호를 발표하자 부산에 토지를 사서 1979년 ‘형제원’에서 ‘형제복지원’으로 명칭을 바꿨고, 1983년부터 부랑아/바랑인 직업보도 업무를 개시했다.
그러다가 1987년 3월 22일 원생 1명이 숨지고 35명이 집단 탈출하면서 그 실체가 세상에 알려졌다.
부랑아 선도를 명목으로 길거리 등에서 노숙자, 행려병자, 고아들을 물론 통금 이후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무차별적으로 끌고 가서 감금시킨 후 강제노역을 시켰다. 이를 위해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가했다. 젊은 여성에게는 성폭행도 이뤄졌다.
강제노역을 하게 되면 국가보조금과 작업수당까지 원장에게 빼앗겨 주머니에 들어갔다. 수용자 1일 수당이 3~5백원, 장애인들은 2백원, 요양원 입원자는 3일에 버스 토큰 1개씩이었다. 물론 외부 선전을 위해 적금통장이 있었지만 피해자들은 돈을 받을 수 없었고, 탈출을 시도하게 되면 무차별 폭행을 당해야 했다.
피해자들은 공동 숙소와 빈곤한 식사 뿐이었다. 물론 숙소 건설과 식사 준비 모두 피해자들이 해야 했다.
이로 인해 사망한 피해자들도 많았고, 피해자가 사망하면 인근 의과대학에 해부실습용으로 3백~5백만원에 팔려나갔다.
정부가 협조
이같은 행태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산시가 이를 동조 또는 방조했다는 점이다. 만약 피해자가 탈출을 하면 경찰들이 “원래 사는 집을 찾아줄테니 경찰차에 타라”고 하고 복지원에 데려다 줬다. 또한 사망 원인도 고의로 날조하면서 피해자는 그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1986년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 김용원 주임검사가 포수와 함께 사냥 나갔다가 현장을 발견하고 사진을 찍은 후 압수수색 영장을 받아 복지원의 참상과 비리를 목격했다. 이후 울산남부경찰서에 구속됐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이를 빨리 덮고 싶어 했다. 무엇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이 발생하는 격동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온갖 훼방을 하면서 유야무야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