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9월 12일 김익상 의사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역사속 오늘리뷰] 9월 12일 김익상 의사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4.09.12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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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상 의사.
김익상 의사.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21년 9월 12일은 김익상 의사가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한 날이다. 많은 독립운동가가 있었지만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인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한 인물은 김익상 의사 한 명 뿐이다.

1895년 한성부에서 목재 상사를 경영하던 아버지 아들로 태어났지만 목재 상사가 일본인에게 속아 가산을 탕진하면서 실의에 빠졌고, 김익상 의사가 21세가 되던 1915년 사망했다.

김익상 의사는 광성연초공사에 입사해 1920년 중화민국 봉천성 심양현 지점으로 전근을 갔다. 우여곡절 끝에 톈진시에 갔던 김익상 의사는 비행사를 꿈꾸면서 광동성으로 향했지만 국민당 호법정부가 운영하던 비행학교는 폐교가 됐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로 향했다. 그리고 김원봉이 조직한 무장 투쟁 독립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다.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단장 김원봉의 명령에 1921년 국내로 잠입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져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를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일본인으로 위장해 기차를 타고 국내 잠입을 했고, 사촌동생 집에서 묵으면서 9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했다.

이후 김익상 의사는 전기 수리공으로 변장하고 2발의 수류탄을 지니고 조선총독부 청사로 잠입했다. 2층 비서과에 폭탄을 던졌지만 폭탄이 불발됐다. 이후 회계과장실에 폭탄을 던졌고 폭발됐지만 아무도 없었다.

폭탄소리에 놀라 일본 헌병들이 2층으로 뛰어오르고 있을 때 김익상 의사는 2층으로 올라가면 위험하다면서 조선총독부 청사를 유유히 빠져 나갔다.

그리고 중국으로 곧바로 돌아갔다. 1922년 3월 다나카 기이치 육군대장이 필리핀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면서 다나카 기이치를 사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1922년 3월 28일 다나카 기이치에게 총을 쐈지만 영국인 여성 등에 맞으면서 즉사했다. 그러면서 거사가 실패됐다.

이후 행적 묘연

이후 도망 다녔지만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됐고, 일본 나가사키로 이감됐고, 1심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상고심에서 징역 20년으로 감형됐다.

김익상 의사의 이후 행적은 불분명하다. 1925년 옥중에서 순국했다는 말도 있지만 20년 옥고를 치르고 만기 출소를 한 이후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이후 행적이 묘연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후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무후선열 위패가 봉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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