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86년 9월 20일은 86아시안게임이 개막한 날이다. 그 해 10월 5일까지 서울시에서 열린 제10회 하계 아시안게임 행사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최된 종합 국제 스포츠 대회이다. 더욱이 2년 뒤 개최된 88서울올림픽의 리허설 성격이 강한 대회였다. 이로 인해 전두환 정권은 엄청난 에너지를 아시안게임에 쏟아 부었다.
박정희 때부터 추진
아시안게임은 박정희 정권 당시인 1970년에 개최될 뻔했다. 하지만 1968년 이른바 1.21 사태로 인해 남북 긴장 상태가 되면서 개최권을 반납했다. 그것은 표면적 이유였고, 만약 아시안게임이 개최된다면 서울시 재정이 바닥 날 수 있다는 경고 때문에 반납을 한 것이다.
1977년 국민소득 1천불을 달성하고 수출 100억불을 돌파하면서 개발도상국으로 발돋움하자 아시안게임 유치 여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1979년 공식적으로 유치에 도잔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또 다시 올림픽 유치에 나선 것이다. 하나의 국가에서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유치를 동시에 추진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아시안게임을 통해 개최 능력을 보여주고 올림픽까지 성공적으로 개최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였고, 사실 올림픽 유치는 기대가 낮았다.
당시 서울시의 경쟁 상대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였다. 그런데 유치 과정 속에서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이에 서울시로 기울어지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문제는 갑작스럽게 유치에 뛰어든 도시가 있었으니 바로 ‘평양’이었다. 북한이 대한민국이 아시안게임을 유치하는 꼴을 볼 수 없다는 심보로 유치 신청을 한 것이다. 다만 국제사회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86아시안게임은 서울에서 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아시안게임 이후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나서 방송은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위대한 영도력 덕분에 우승했다는 특별방송을 방영했다. 그러면서 시청자들의 반감을 샀다. 당시 전두환에 대한 국민감정이 극도로 나빠진 상태에서 전두환을 찬양하는 방송이 나가면서 국민적 감정은 더욱 악화됐다. 이에 수신료 납부 거부운동이 벌어졌고, 결국 그것이 87년 민주화운동의 도화선 중 하나가 됐다.
이런 국내 감정과는 별개로 소련 및 동구권 국가에게는 충격을 안겨준 대회였다. 6.25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대한민국이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뤄내고, 아시안게임을 치렀다는 점은 소련과 동구권 국가에게 자극이 됐다. 이로 인해 88서울올림픽에서 공산권 국가들이 대거 참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본인들이 직접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뤄낸 대한민국을 체험하겠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와는 별도로 서울시에서 존재했던 수많은 판자촌이 사라지고, 서민들은 음지로 숨어들어야 했다. 아시안게임을 관람하기 위해 서울로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한 조처였다. 전두환 정권에게는 그들은 외국인 관광객에게 보여서는 안되는 치부 중 하나로 취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