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886년 9월 23일은 우리나라 최초 근대적 명문 귀족 공립학교인 육영공원이 설립된 날이다. 육영공원 설립은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로 영어를 구사하는 지식인이 필요해지면서 설립됐다.
육영공원 출신 중에 한 명이 이완용이다. 이완용은 육영공원에서 교육을 받은 후 대표적인 친미파 관료가 된다. 하지만 러일전쟁 이후에 본격적인 친일 활동을 하게 된다.
갑신정변 이후
1883년 김윤식이 청나라 동문관을 본따 동문학이라는 외국어 교육기관을 설치해 통역관을 양성하는 것이 영어 교육의 효시다.
1882년 민영익은 보빙사로 미국에 다녀온 후 영어를 가르치는 근대식 교육 기관 설립으 계획했고, 1884년 고종으로부터 육영공원 설치 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갑신정변이 터지면서 1886년 육영공원이 설립됐다. 그 과정에서 주한미국공사관 무관이었던 포크의 노력이 있었다.
육영공원은 좌원(左院)과 우원(右院)으로 나누어, 좌원에는 젊은 현직 관리를 학생으로 받고 우원에는 관직에 아직 나가지 않은 명문가 자제들을 입학시켰다.
학생 선발은 세심하게 사색당파를 안배하여 이루어졌으며, 영어를 위주로 세계사와 지리, 수학 등 신학문을 가르쳤다. 학교 운영 비용은 인천과 부산, 원산의 항구에서 받는 해관세로 충당됐다.
고종은 육영공원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면서 영어과목 시험을 주관하기도 했다.
기숙사 생활에서
육영학원은 모든 것이 무료였다. 매달 담뱃값 명목으로 6원(600전)씩 지급했다.설렁탕 한 그릇이 2전 5리였다는 점에서 엄청난 액수였다. 학생들은 모두 갓을 쓰고 도포를 입었으며, 심지어 가마로 등교하는 학생도 있었다. 책과 담뱃대는 하인이 들고 다녔다.
하지만 학생들은 불만이 컸다. 그것은 규칙이 까다롭다는 것이었다. 또한 신학문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고, 신학문에 대한 관심과 열망이 적었다. 다만 육영공원에서의 공부가 출세와 직졀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학생들이 결석을 하기 일쑤였다.
여기에 정부의 재정이 악화되고 국력이 약해지면서 육영공원에 대한 통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학생들의 태만은 더욱 커졌다. 결국 미국인 교사들은 실망해서 계약기간이 마치자마자 미국으로 돌아갔다. 조정에서 육영공원을 영국인 허치슨(W. F. Hutchison)에게 넘기면서 1894년 폐교됐다. 이후 관립영어학교를 거쳐 한성외국어학교로 통합됐다.
육영공원은 처엠으는 서소문동 38번지 일대(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자리)에 있었으나, 설립 후 5년 후에 박동의 독일영사관(옛 묄렌도르프 저택)과 자리를 맞교환해 이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