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46년 9월 24일은 9월 총파업이 전개된 날이다. 미군정 시기인 1946년 조선공산당이 주도해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일으켰던 사건을 말한다.
9월 23일 부산지역 철도노동자의 파업투쟁을 시작으로 24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주도로 각 산업별 노동조합이 연대투쟁에 들어갔고, 10월 1일 대구 10.1 사건으로 확대됐다.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1946년 5월 이른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미군정의 좌익계열 탄압이 심해지면서 조선공산당 당수인 박헌영은 1946년 6월 23일 합작 5원칙을 발표했다. 합작 5원칙은 토지의 무상몰수·무상분배, 정부기능을 미군정에서 인민위원회로 이양 등을 주장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그해 9월 6일 조선인민보, 현대일보, 중앙신문 등 좌파 우호 신문을 강제로 폐쇄하고 10여명의 신문사 간부를 체포했다. 그리고 조선공산당 최고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을 발령했다. 이에 박헌영은 숨어지내다가 결국 월북을 했다.
그리고 조선공산당은 대중적 투쟁을 선동했고, 총파업에 들어갔다. 이에 23일 부산지역 7천여 철도 노동자들이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4만여 철도노동자가 참여했고, 금속, 화학 등 전 산업 분야에서도 15만 노동자가 파업을 벌였다.
뿐만 아니라 27일에는 서울의 중학교와 전문학교 학생 1만 5천 명도 가세하여 학원의 자유,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등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다.
대구 10.1 사건으로
미군정이 심각성을 느끼면서 30일 서울철도 파업단에 탱크와 기관총을 무장한 경관 2천여명을 투입했고, 이어 대한노총(현 한국노총), 대한민청, 독촉 등 반공 우파 청년단 1천여 명도 가세했으며, 김두한의 대한민청 필두로 8시간에 걸쳐 시가전을 벌인 뒤 3명의 간부가 사망하고 부상자가 수백 명에 총 1700여 명이 연행되면서 우파세력에게 점거되면서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대구지역 노동자들의 파업시위에 경찰이 발포하면서 대구 10.1사건으로 발전했고, 그 과정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형 박상희씨가 경찰의 발포에 의해 사망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남로당에 가입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