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정비석 작가 소설 자유부인은 1954년 1월부터 8월까지 서울신문에 연재된 소설이다. 전쟁 후 대학교수 부인의 불륜과 가정 귀환을 통한 퇴폐한 사회 풍조와 주변 인물을 다룬 것으로 많은 화제가 된 작품이다.
오늘날 보면 ‘시시한(?) 내용’이었겠지만 당시에는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부인이 대놓고 불륜을 저지른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륜 묘사라고 하면 연인과 함께 댄스홀 다니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 당시에는 금서로 지정될 정도로 사회적 파급력은 상당했다.
줄거리 살펴보면
국문과 교수 장태연은 성실한 교수였고 아내인 오선영은 가정주부였다. 오선영이 우연한 기회에 대학 동기동창인 최윤주의 권유로 ‘화교회’에 참석하면서 자기 자신과 비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점차 바깥세계에 눈을 뜨게 됐고, 사교춤에 대한 선망의 감정을 느끼게 됐고, 남편의 제자인 신춘호와 춤바람이 나면서 가정이 깨질 위기에 놓이게 됐다. 그러나 오선영이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가정으로 돌아가게 된다.
당시 사회 현상 반영
당시 모 대학교수(훗날 법무부 장관)는 정비석 작품을 읽고 논평을 해달라고 하자 “중공군이 나라에 쳐들어왔으면 쳐부수면 될 것이지, 왜 쳐들어왔는지 먼저 알아내자는 소리나 다름없다”고 맹비난했다.
또한 정비석을 향해서는 “야비한 인기욕에 사로잡혀 에로작문을 희롱하는 문화의 적(賊), 문학의 파괴자, 중공군 50만명에 필적하는 적(敵)”이라고 규정했다. 이에 정비석은 “폭력단 이상으로 무서운 무지에서 오는 폭언”이라고 반박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특무대로 정비석 작가를 연행시키도록 명령을 내렸고, 특무대 경찰관들은 그에게 김일성의 지시로 남한을 음란·퇴폐하게 만들어 적화를 기도하지 않았느냐면서 고문을 가하기도 했다.
결국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면서 금서에서 해제됐다.
여성의 경제적 지위 향상과 더불어
이와는 별개로 자유부인이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전후 당시 4만부라는 판매고를 올렸다는 점에서 수많은 독자들이 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54년 전후 사교춤이 유행했고, 전쟁으로 인해 남편을 잃은 부인들이 많이 배출되면서 이들이 직업 전선에 뛰어들면서 여성들의 경제적 지위 향상과 허영·퇴폐 풍조가 사회적 문제로 제기됐기 때문이다.
정비석 작가는 이런 풍조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지성의 힘이라는 점을 각성하기 위한 의도로 작품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