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여론조사
[역사속 경제리뷰] 여론조사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4.11.01 14: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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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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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여론조사는 어떤 쟁점에 대한 사회의 여론을 표본조사를 통해 통계적으로 알아보는 일을 말한다. 제대로 진행한 여론조사라면 국민적 여론을 충분히 반영하기 때문에 효율적으로 국민의 의사를 알아볼 수 있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초반에 여론조사를 실시할 때는 ‘효율성’ 측면이 강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여론조사가 신뢰를 할 수 있느냐를 두고 그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국민적 여론을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수단인 것은 틀림 없지만 실시한 집단 등에 따라 여론조사 결과의 변수가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도 실시했던 여론조사

여론조사하면 떠오르는 군주가 있다. 바로 조선시대 세종대왕이다. 세종 12년 1429년 세금 문제를 두고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1427년 과거시험을 통해 토지에 따른 세금 문제를 어떤 식으로 해결해야 할 것인지 물었고, 신하들의 의견을 들었다. 그러다가 세종대왕은 백성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하겠다고 결심을 했다. 이에 1429년 호조에 명해서 전국적인 여론조사를 하라고 했고, 5개월에 걸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이때 17만명의 백성이 참여했다. 찬성이 9만여명, 반대가 7만여명으로 세종의 조세 개편안이 통과될만 했었어도 결국 또 다시 토지 조세제도에 대한 수정 개편을 하면서 토지 등급을 6등급으로 나누고 풍작과 흉작 정도를 9등급으로 나누면서 54가지 세금 기준인 ‘전분6등제’와 ‘연분9등제’를 마련해서 또 다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렇게 해서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토지제도가 완성됐다.

현대적 의미의 여론조사는

현대적 의미의 여론조사는 미국에서 시장조사 때문에 나타났다. 1930년대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기업들은 점차 소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생산되면 소비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하지만 무조건 생산만 한다고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점차 마케팅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여론조사의 중요성도 제기됐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조지 갤럽이다. 1935년 조지 갤럽은 정치·사회 문제에 대해 전국적인 의견조사를 실시하면서 여론조사가 점차 보편화됐다.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미국은 전세계를 대상으로 여론조사 실시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 이유는 그 이전까지만 해도 제국주의는 식민지를 건설하고 그에 따라 경제적 착취를 해왔지만 미국은 더 이상 식민지를 운영할 수 없게 되면서 그에 따라 여론조사의 중요성이 대두됐다. 또한 미국 정치에서 여론조사의 필요성이 더욱 대두됐다. 왜냐하면 여론조사가 누가 당선되는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효율성 내세웠지만 정확도 떨어져

이에 여론조사가 정치권에서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효율성 측면에서 상당히 큰 효율을 얻게 됐다. 1천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해서 국민적 의중을 확인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권에서는 여론조사의 중요성이 커져갔다. 문제는 여론조사의 변수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모집단의 설정, 설문지 내용, 인터뷰 내용, 결과 분석 등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데이터가 정치적으로 왜곡이 되면서 자신의 입맛에 맞게 여론조사 결과가 나온다는 점이다. 이에 과연 여론조사의 정확성이 담보되는 것인지에 대한 회의적인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누구를 대상으로 조사를 했느냐, 어떤 질문 내용을 했느냐, 질문 내용의 순서가 어떻게 됐느냐, 어느 시간대에 조사를 했느냐, 최근에는 유선전화와 휴대폰 조사 등의 비중이 어떻게 됐느냐 등 변수가 너무 많이 작용하기 때문에 과연 정확성을 담보하느냐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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