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6월 3일 6.3 항쟁 발발
[역사속 오늘리뷰] 6월 3일 6.3 항쟁 발발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6.03 09: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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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대표들과 만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학생 대표들과 만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64년 6월 3일은 6.3 항쟁 발발일이다. 1964년 우리나라에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면서 대학생 및 일반시민 그리고 재야 인사들이 주도해 일으켰던 반일 성향 항쟁이다. 그 이전까지는 박정희 정권에 대해 호의적인 4.19 세대였지만 6.3 항쟁을 계기로 반박정희 반대 투쟁 즉 군부독재 타도투쟁으로 성격이 바뀌어 버린다.

한일수교 비밀리에 추진

1963년 대선 때 겨우 승리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한국경제 활성화 및 부흥을 목적으로 국교가 단절됐던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위해 한일수교를 비밀리에 추진한다. 우리나라의 저렴한 노동력과 일본의 자본 그리고 우수한 기술력이 결합해서 공산품을 수출해야 한다고 박정희 대통령은 생각했다. 여기에 1961년 소련, 북한, 중국이 전쟁 발발 시 군대 자동개입이 담긴 ‘동맹조약’을 체결하자 미국은 우리나라에게 일본과 수교하라는 압박을 하게 된다. 하지만 해방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일본과 수교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분위기 때문에 세상에 공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해방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세대의 반일 감정은 극에 달했고, 그것을 보고 듣고 자란 세대가 4.19 세대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반일 감정이 몸에 익숙해져 있었다. 더욱이 일본 측은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에 끼친 피해에 대해 어떤 식으로 보상할 것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공개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비밀교섭을 하게 됐으니 반일감정이 폭발하는 것은 당연했다. 더욱이 당시 야당에서도 한일수교에 대한 비판적인 반응을 내놓으면서 불을 당겼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대일외교굴욕투쟁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장택상 역시 현대판 한일병합이라고 반대했다. 그야말로 공화당을 제외한 모든 야당과 재야 인사들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3월 9일 서울 종로예식장에서 총궐기를 했다. 그러면서 최대 규모의 반일 시위가 시작됐다.
학생 대표들과 만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학생 대표들과 만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최대 1만명 참여

3월 30일 11개 대학 학생대표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면담하면서 일단 진정되는 듯 했으나 박정희 정부가 계속해서 한일회담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6월 3일 1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시위에 참가했다. 당시 일장기와 일본 수상 허수아비를 불태웠을 뿐만 아니라 박정희, 김종필 등의 매국노 화형식을 거행했다. 그러면서 시위가 격화됐다. 그러자 결국 6월 3일 오후 8시 비상계엄령을 전국에 선포하고 진압 조치에 나섰다. 그리고 일체의 옥내외 집회, 시위의 금지, 대학의 휴교, 언론·출판·보도의 사전검열, 영장 없는 압수·수색·체포·구금이 가능하며 통행금지시간 연장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각하 트럭 1000대를 징발해 주십시요. 학생주동자 놈들을 무인도로 격리해 쥐도새도 모르게 해치우겠습니다”라고 말했는데 민복기 법무부 장관이 오히려 시위만 확산된다고 말했고, 박정희 대통령도 “전국민을 적으로 만들겠다는 것인가”라고 했다고 한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해당 발언 때문에 혹여 일본과의 회담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학생들의 시위를 일부러 방조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항쟁의 주도자는 이명박 전 대통령, 이재오 전 의원, 서청원 전 의원, 김덕룡 전 의원, 한광옥 전 의원, 손학규 전 경기지사 등이다.

친박정희에서 반박정희 투쟁으로

6.3 항쟁은 그 이후 다소 잠잠해졌고,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수교를 맺었다. 6.3 항쟁의 의의는 그동안 박정희 정권에게 우호적이었던 4.19 세대 즉 당시 학생들이 반박정희 투쟁으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4.19 혁명을 기반으로 제2 공화국 즉 장면 정부가 탄생했지만 극심한 혼란이 거듭되면서 5.16 쿠데타가 발생했다. 쿠데타로 박정희 군부가 실권을 잡았지만 당시 학생이나 재야세력은 박정희 군부에 대해 환영을 보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박정희 군부가 혼란스런 정국을 수습할 것이라고 기대를 했다. 그리고 박정희 의장은 군대로 돌아가지 않고 대선 출마를 했으며 윤보선 전 대통령과 경쟁해서 대선 승리를 했다. 일부 지식인들이나 학생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군대로 돌아가지 않고 대선 출마를 한 것에 대해 못 마땅해 했지만 대다수 지식인들이나 학생들은 여전히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했었다. 그런데 한일수교를 한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처음에는 한일수교 반대 투쟁의 성격이 강했는데 점차 반정부 투쟁으로 성격이 바뀌게 됐다. 그리고 6.3항쟁을 시작으로 반독재 투쟁이 1960년~1980년대까지 이어졌고, 87년 민주화운동으로 결실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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