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가던 삼성일가 차남
이창희는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차남이다. 즉, 이맹희의 큰 남동생이자 삼성전자 회장 이건희의 작은형이다. 경상남도 의령군 출신으로 보성중학교를 졸업했고, 1956년 일본으로 건너가 가쿠슈인대학에 입학하였고 1964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했다. 귀국 후 삼성그룹에 입사하면서 삼성의 후계자 중 하나로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비료 이사, 제일모직 이사, 삼성물산 이사 등을 거치면서 삼성그룹의 후계자 중 한명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196년 사카린 밀수사건이 발생하면서 수감생활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출소 후 1969년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하면서 후계 구도에서 배제됐다. 당시 아버지 이병철 회장에 대한 어두운 단면을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그 편지를 이병철 회장에게 건네줬다. 이창희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이 삼성 일가의 후계구도에 깊게 개입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삼성 일은 삼성이 알아서하라면서 개입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이병철 회장이 대노했고, 결국 후계 구도에서 완전히 배제됐다.삼성과 결별하면서
이창희 회장은 결국 삼성과 결별하면서 새한미디어를 세웠고, 1973년 새한종합개발, 새한콘크리트 등을 묶어 새한미디어그룹을 만들었다. 1980년대 비디오 플레이어가 보급되면서 주력상품이던 비디오테이프 역시 날개 돋힌 듯이 팔렸다. 여기에 학생복이 불티나게 팔리면서 새한그룹은 대기업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하지만 1991년 혈액암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이후 씨티은행 서울지점에서 근무하던 이재관 부회장이 새한그룹을 물려받으면서 삼성그룹이 보유한 제일합섬 지분을 넘겨받아 1995년 삼성그룹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왔다. 새한의 최대주주였던 이재관 부회장은 워크아웃 당시 ㈜새한의 지분 16.15%, 새한미디어의 1.38%를 보유하고 새한이 새한미디어 주식의 23.58%를 갖고 있어 이 부회장은 자연스럽게 새한미디어의 최대주주가 됐다. 이 부회장은 이 지분을 갖고 그룹출범 이후 전권을 휘둘렀다. 1997년 당시 계열사 12개를 거느린 재계 순위 20위 중반의 중견그룹으로 새한그룹으로 정식 출범하였으며 제일합섬의 후신인 (주)새한을 모기업으로 새한미디어가 주요 계열사였다. 새한은 삼성에서 분리해 그룹을 형성하면서 대대적인 사업 확장에 나섰다. ㈜새한은 1990년대 중반부터 수년간 구미공장에 1조원을 투자했다. 하지만 곧바로 섬유/필름 사업의 경기 침체가 드리워졌다. 삼성에서 분리될 당시 흑자기조였던 제일합섬이 (주)새한으로 바뀌면서 1998년까지 구미2공장의 화학섬유필름 부문에 1조원을 퍼붓는 등 설비투자를 늘리면서 금융비용이 눈덩이처럼 늘었다. 그러다 시장침체로 가격이 하락하자 1999년 일본 도레이에 6천억 원이라는 헐값에 매각했다. 1997년 외환위기에도 구조조정에 등한시하면서 문어발 경영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비디오테이프 사업 역시 디지털 기기의 발달에 따라 수익창출을 내지 못하게 됐다.결국 워크아웃 신청
새한이 자금난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일부 종금사가 자금 회수에 나섰다. 이에 2000년 5월 12일 이사회를 열어 결국 구조조정을 단행하기로 했다. 이어 5월 16일 최정덕 사장이 공식 발표를 통하여 계열사 12개를 3개로 축소하고 마포사옥과 경산공장부지 등 계열사 지분 및 자산매각 등을 통해 5000억원의 재원을 조달하기로 했다. 하지만 구조조정이 모두 실현되지 않으면서 시장의 불신을 해소하지 못했다. 이재관 부회장은 이영자 회장만 퇴진시키는 방향으로 경영권을 계속 행사하려고 했다. 이에 채권단에서 대출연장 거부 등 압박을 가해 결국 (주)새한, 새한미디어(주) 등은 2000년 5월 18일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이후 오너 일가가 주식포기 각서 제출 후에 워크아웃이 승인, 개시되어 계열사는 모두 매각하거나 청산됐다. 한때 학생복, 비디오 테이프 등으로 잘 나가던 회사가 하루아침에 워크아웃 신세가 되면서 공중분해된 것이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