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10월 12일 대한제국 선포
[역사속 오늘리뷰] 10월 12일 대한제국 선포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10.12 0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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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897년 10월 12일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한 날이다. 이날 전제군주제 국가인 대한제국이 세워졌다.

뿌리 자체는 조선 왕조에서 계속 이어졌기 때문에 대한제국과 조선은 별개의 나라가 아니라 연속된 계승국으로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엄연히 따지면 조선왕조는 이날 멸망하고, 새로운 군주제가 탄생하게 됐다.

조선왕조에서 대한제국으로 변신하면서 고종황제는 근대화로 나아가는 개혁을 단행했지만 러일전쟁 패배로 인해 결국 대한제국은 일제에 먹히게 됐다.

경복궁 두 번이나 점령

조선은 동학농민운동 당시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려고 했다. 이에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을 상륙하자 청나라는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에게 이를 통보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빠르게 인천으로 상륙해서 곧바로 경복궁으로 향했다.

경복궁에서 3시간의 저항이 있었지만 일본의 신식군대 앞에서 무기력하게 경복궁을 넘겨줘야 했다.

그리고 청일전쟁이 벌어졌고,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삼국간섭을 표명한 러시아 제국 앞에 일본이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면서 민비는 러시아와 친분을 쌓아갔다.

그것을 좌시하지 않았던 일본은 결국 경복궁 담을 넘어 민비(대한제국 이후 명성황후로 추존)를 살해했다.

두 번이나 경복궁을 점령당하자 고종은 일본군과 친일파에게 살해를 당할 수도 있다는 위협을 느끼게 되면서 처음에는 미국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려고 했다. 하지만 춘생문 사건이 발생하면서 실패를 하자 결국 러시아 공사관 즉 아관파천을 단행하게 된다.

특히 러시아 공사인 베베르와 러시아 황제인 니콜라이 2세와 교류가 잦아지면서 러시아 공사관에서 새로운 나라를 꿈꾸게 하기 충분했다.

사진=픽사베이
덕수궁 석조전./사진=픽사베이

아관파천 1년의 생활

아관파천 즉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고종은 빠르게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무력으로 답이 안나오고 외교로도 답이 안나온다고 판단한 고종은 ‘위로부터 개혁’을 단행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전제군주제로 가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위로부터 개혁’이었다. 또한 살해 위협이나 반란의 위협이 있었기 때문에 전제군주제로 나아가기로 결심을 한다.

하지만 전제군주제로 선포할 경우 주변국 즉 일본의 반발이 극심해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제군주제로의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 첫 출발로 환구단을 지었다.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황제’만 가능하다. 그 이전까지는 사직단을 지었는데 제국을 선포하게 되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기 때문에 환구단을 지었다.

그리고 러시아 장과의 훈련으로 양성한 1천명의 호위병력인 시위대를 갖췄다. 이것이 1년 정도 시간이 걸렸다.

독립문, 현판 글씨는 이완용 작품./사진=문화재청
독립문, 현판 글씨는 이완용 작품./사진=문화재청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

1천여명의 시위대가 갖췄다고 생각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과 가까운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한다. 그리고 8개월 후인 10월 12일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그러면서 을비사변 이후 국장을 미뤄왔던 민비를 명상황후로, 왕세자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그런데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해왔다. 그러다보니 대한제국 선포와 더불어 독립협회와는 상당히 많은 괴리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전제군주제를 주장하는 황국협회와 정치적 갈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독립협회는 결구 해산된다.

근대화로

이후 대한제국은 근대화로 나아갔다. 그동안의 개혁은 ‘5군영’을 축소시키고 ‘별기군’ 신식 군대를 육성시켜 무력을 키워서 독자적인 왕조를 나아가려고 했고, 동학농민운동 과정에서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을미사변을 계기로 외교전에 총력을 기울였다면 대한제국부터는 근대화로 나아가는 것에 주력을 다했다. 그것이 광무개혁이다.

이때 지방행정도 개편돼서 오늘날의 행정조직과 비슷하게 됐다. 그리고 도로망과 전기 등 기간시설을 구축하고, 상공업을 진흥시켜 세수를 크게 늘렸다. 그리고 외국 자본에 각종 부설권과 광산개발권을 주고 세금을 부여하게 했다.

아울러 경작지에만 국한되던 토지측량을 임야와 해안 등 모둔 국토에 대한 지질 조사를 하면서 토지결수를 늘리고 집세를 부과했다.

그리고 근대식 교육기관을 많이 확충해서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많은 대학교와 고등학교 등등이 이때 설립됐다.

실제로 구한말 조선땅을 방문한 외국인과 대한제국의 땅을 밟은 외국인들이 하나같이 한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반응이었다.

다만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하면서 대한제국의 개혁은 좌절됐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이 없지만 5년 정도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대한제국이 일본에 쉽게 먹히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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