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기생
[역사속 경제리뷰] 기생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11.10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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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드라마 황진이.
KBS 드라마 황진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기생은 관기, 민기, 약방기생(의녀), 상방기생 등 예기의 총칭이다. 하지만 흔히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나 춤 또는 풍류로 흥을 돋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여자를 말한다. 흔히 기생이라고 하면 매춘부를 함께 떠올리지만 조선시대 기생은 매춘을 공식적으로는 하지 않았다. 양반 역시 기생에게 잠자리를 요구하지 않았다. 춘향전에서 변사또가 춘향이에게 ‘수청을 들라’고 한 것은 실제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급 전문직업 여성

기생은 흔히 매춘부로 인식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고급 전문직업 여성이었다. 물론 기생의 최하위 계급인 삼패는 매춘부 역할을 했지만 일패나 이패는 매춘부 역할을 하지 않았다. 일패와 이패는 노래와 춤 그리고 풍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양반들이 즐겨 찾았다. 하지만 삼패는 노래와 춤 그리고 풍류가 안되기 때문에 결국 매춘부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일패 기생과 이패 기생은 나라가 직접 관리하면서 왕족이나 양반, 부자들을 주로 상대했다. 이런 이유로 일패 기생이나 이패 기생은 왕족이나 양반, 부자들이 함부로 잠자리를 요구하지 못했다. 특히 일패 기생은 외국에서 오는 귀빈들을 접대하는 업무까지 했기 때문에 잠자리를 요구했다가는 경을 치기 일쑤였다. 이패 기생은 관기와 민기로 나누는데 관기는 문무백관을 상대하며 민기는 일반 양반을 상대한다. 원칙적으로 매춘이 금지돼 있다. 따라서 음지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매춘이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패 기생은 일반 평민을 상대로 한다. 그렇다고 평민들이 함부로 삼패 기생을 부를 수 없었다. 일반 평민들을 상대하는 매춘부는 들병이, 화랑유녀, 작부 등으로 불렀다.
KBS 드라마 황진이.
KBS 드라마 황진이.

기생청 존재

조선시대는 일패 기생을 관리하는 기생청이 존재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연산군 시절 ‘흥청’이다. 흥청은 일패 기생을 관리하는 기관이다. 이런 기생청이 연산군에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내내 존재했다. 따라서 연산군이 특별히 일패 기생에 대한 사치를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현대 역사학계의 평가이다. 다만 일패 기생들을 대상으로 엽기적인 행각을 했기 때문에 논란이 된 것이다. 연산군의 엽기적인 행각은 결국 쫓겨나게 만들면서 ‘흥청망청’이라는 단어가 나오게 됐다. 일패 기생들은 자신의 직업 정신이 뛰어났다.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 관료가 일패 기생들에게 시침을 요구하자 이에 반발해서 자살을 했다. 일패 기생이나 이패 기생이나 삼패 기생이나 모두 ‘시’를 읊고 유교 경전을 읽을 줄 알아야 했다. 그래야만 남성을 상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기생문학’이 따로 있었다. 삼패 기생은 일반 평민을 상대로 하지만 그 일반 평민들 역시 상당한 학식을 가진 선비들이었기 때문에 함께 상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학식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술자리에서

기생과 함께 하는 술자리라고 하면 흔히 생각하기에 양반 옆에 기생이 앉아서 술을 따라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이 아니다. 기생은 음주가무에서 가무만 담당했다. 즉, 한쪽에서 노래나 춤을 췄고, 시를 지거나 난을 쳤다. 또한 기생의 신조는 매창불매음(賣唱不賣淫), 즉 “노래를 팔지언정 몸을 팔지는 말라”였다고 한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매춘을 할 수 없었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기생은 유흥주점 접객원이 아닌 걸그룹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역사적 기록 곳곳에서는 기생이 매춘을 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매춘은 금지돼 있었다.
KBS 드라마 황진이.
KBS 드라마 황진이.

일제강점기에서의 변화

일제강점기인 1916년 3월 데라우치 총독이 일본식 유곽(공창) 제도를 공포했다. 이에 기생은 ‘권번’에 기적을 두고 세금을 내며 활동하는 허가제로 운영하게 됐다. 권번은 기예를 가르치며 기생의 요정 출입을 지휘하고 화대를 받는 중간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일본은 경선의 신마치와 혼마치 등에 공창 지역을 설치하면서 공창이 이뤄지게 됐고, 권번제도는 1942년 폐지됐다. 그러면서 사실상 기생이라는 개념이 사라졌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서도 기생은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나가기도 했다. 3.1 만세운동 당시 기생들의 역할이 상당히 컸다고 한다. 기생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임시정부 등에 독립자금을 보낸 기록 등도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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