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비의 난
마침 경원에 충군으로 온 진주사람 강필경이 옥지의 존재를 알았다. 옥비는 15세기 즉 성종 시절 함경도 경원부 소속 과나비였다. 두만강 하류 지역에 위치한 경원은 여진족 약탈이 심해서 사람이 살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사람이 살게 하기 위해 남쪽지방 백성들을 옮겨 살게 했는데 노비에게는 면천을, 범죄자에게 형벌 대신으로, 양인에게는 토관의 혜택을 줬다. 곡식 종자와 농기구, 집과 살림살이 등이 마련됐었다. 그런데 성종 들어서 세종대왕의 4군 6진 의미가 퇴색되면서 정부에서의 지원도 없이 무조건 백성들의 이주로만 이뤄졌다. 옥비가 어떤 경로로 관비가 됐는지는 모르지만 진주 출신 무인의 수청을 들다가 해당 무인이 귀향을 하면서 첩이 됐다. 관비는 국가의 재산이기 때문에 개인이 함부로 소유할 수 없었다. 옥비가 양반의 첩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속량으로 양인이 되는 것과 신분을 속이는 거이었다. 옥비는 신분을 속이고 진주로 숨어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양반의 첩으로 새로운 삶을 살면서 많은 자식들을 낳았고, 그 자식의 후손들은 이제 양반가의 명문 자제들이 됐다. 그런데 선조에 들어서 옥비가 원래 경원지방 노비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종모법에 의해 그의 자손들이 노비가 되고, 경원 지방으로 이주해야 했다. 이를 두고 ‘옥비의 난’이라고 불렀다. 옥비의 자손은 80여년 만에 졸지에 천민으로 전락해야 했다. 자신이 양반의 자손인 줄 알았는데 하루아침에 노비의 자식이 된 것이다.세종의 4군 6진
4군 6진은 세종대왕 시기의 북방개척 정책이다. 1433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된 최윤덕 장군이 조선군 약 15,000명을 이끌고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이어서 1436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된 이천(李蕆) 장군이 1437년 2차로 여진족을 토벌하며 최윤덕, 이천 장군이 설치한 4군(四郡)과, 1433년 김종서 장군이 이징옥, 황보인 등과 함께 함길도(지금의 함경도) 지방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두만강 유역에 설치한 6진(六鎭)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이는 단순히 군사를 일으켜 해당 땅을 점령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삼남 지방 백성들을 이주해서 인구를 보충하는 사민정책까지 포함된 것이 4군 6진이다. 조선 이전에도 해당 지역에 군대를 보낸 사례가 많이 있다. 특히 강동6주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조선 이전에만 해도 백성들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군대를 보내서 국경선을 지키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세종대왕은 군대를 보내 국경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이주를 통해 확실하게 조선 땅으로 삼으려고 했다. 문제는 해당 지역은 그야말로 척박한 땅이었기 때문에 이주를 시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해당 지역은 벼농사도 되지 않는 지역이었고, 구황작물도 없었다. 이런 이유로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이주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중앙정부가 강제로 이주를 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세종대왕은 자발적으로 백성들이 이주하게끔 하는 정책을 마련했다. 그것은 천민에게는 속량 즉 양인이 되게 해주면서 부역을 면제시켰다. 향리나 역리의 경우 부역 면제와 관직 진출의 길을 열어줬다. 양반이면 자품을 높이거나 토관직을 줬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혜택이었다. 그러다보니 원래 삼남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정책이었지만 평안도 출신들도 많이 이주했다. 문제는 해당 지역이 사람이 살만한 동네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죽어나가는 것이 비일비재하면서 결국 해당 지역에서 도망치는 사례가 많이 발생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성종 때부터 4군 6진의 의미도 퇴색되면서 인구가 급속도로 빠져 나갔다. 우리나라가 세종대왕 때 4군 6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영토 확장 정책을 펼치지 못했던 것은 인구의 증가가 이뤄지지 않았고, 인구의 이동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해당 지역에서 곡물의 산출이 어느 정도 이뤄졌다면 인구의 이동이 일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인구의 증가가 이뤄지면서 영토 확장으로 이어졌을 것이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