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임진왜란 그리고 일본 노예무역
[역사속 경제리뷰] 임진왜란 그리고 일본 노예무역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05.19 13: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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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캡쳐
경향신문 캡쳐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임진왜란은 혹자들은 ‘도자기 전쟁’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다. 일본이 도자기를 좋아하면서 조선의 도공을 납치해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혹자는 임진왜란을 노예무역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본이 조선땅에 사는 백성들을 납치해 유럽에 노예로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수출할 상품이 없는 일본으로서는 주력 상품이 바로 ‘인간’ 즉 ‘사람’이었다. 일본까지 진출한 포루투칼 상인에 의해 조선 백성과 일본인이 유럽에게까지 팔려나가게 됐다.

전국시대 겪으면서 필요해진 조총

일본은 전국시대를 겪으면서 포루투칼로부터 수입했던 것이 바로 ‘조총’이었다. 문제는 조총을 사용하기 위해 가장 필요했던 것이 바로 ‘화약’이다. 이 화약을 일본이 구입하기 위해서는 결국 포루투칼 상인을 통해 해결하는 것 이외에 방법이 없었다. 문제는 일본에서 생산해서 유럽 전역에 판매할 상품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다이묘들이 고안한 것이 바로 사람 즉 노예 무역이었다. 자신의 영지에 있는 농민들을 사냥해서 그 농민을 포루투칼 상인들에게 팔고, 화약을 얻어서 전쟁을 치렀다. 일본사에는 16세기 큐슈지방의 노예사냥 현장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포루투칼 상인들이 아시아 사람들은 선호한 이유는 근면이 좋았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인 소녀들은 성적인 목적으로 노예 무역을 했다.

전국통일 이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면서 노예 무역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제 더 이상 노예들은 노예가 아닌 자신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루투칼 선교사들은 노예무역에 부정적이면서도 포루투칼 상인들의 노예 무역은 눈을 감아줬다. 그러다보니 히데요시가 결국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기도 했다. 아울러 1587년 히데요시는 포루투칼 상인들에 의한 일본인 노예매매를 금지시켰다. 전국의 다이묘들은 날벼락이 떨어졌다. 당연히 다이묘 입장에서 히데요시에 대한 불만이 넘쳐날 수밖에 없었다. 다이묘 입장에서 자신의 영지에 있는 일본 사람들을 사냥해서 포루투칼 상인들에게 팔면 수익이 나기 때문에 일본인 노예매매를 금지시킨 것에 대해 상당한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 위기를 느낀 히데요시로서는 결국 조선 백성에 눈독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까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가서 팔려간 조선 백성이 대략 10만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포루투칼 본국에서 노예 매매 금지했지만

포루투칼 상인들의 노예 매매가 상당한 논란을 일으키자 1570년 9월 20일에 일본인 노예매매 금지령을 내렸으나 효과는 없었다. 결국 1595년 포르투갈은 중국과 일본 출신 노예들의 매매를 완전히 금지하는 법을 통과 시켰다. 하지만 계속해서 노예무역은 계속됐고, 1626년이 돼야 에도 막부에서 노예 매매를 금지했다. 그러나 20세기까지도 계속해서 일본인 노예 무역은 꾸준하게 이뤄졌다. 조선 정부는 임진왜란 끝난 이후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서 납치한 조선 백성들의 생환을 위해 노력을 했지만 납치해 간 조선 백성의 숫자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랐다. 그리고 그렇게 일본에 의해 납치된 조선백성들은 전세계로 팔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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