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영조의 금주령
[역사속 경제리뷰] 영조의 금주령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06.14 13: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조선시대 영조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금주령을 내린 국왕이다. 재위기간 내내 금주령을 내렸는데 그 중에 영조 32년의 금주령은 10년간 이어졌다. 영조가 금주령을 내린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경신대기근, 을병대기근 등이 발생하면서 쌀이 귀한 시대가 되면서 금주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과 영조 자체가 술 마시는 것 자체를 싫어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조는 조선을 ‘금주국가’로 만들고 싶어했다.

인간의 욕망 통제하기 힘들어

하지만 금주령이 오히려 상당한 부작용을 발생하게 했다. 영조실록 28년 12월 20일 기사에 따르면 우의정 김상로가 말하기를 금주를 내린 뒤 술집이란 이름만 붙어 있으면 추조와 한성부의 관리들이 별도로 금란방을 설치해 날마다 돈을 징수했다고 기록돼 있다. 즉,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영조는 음주가 적발되면 적발된 사람뿐만 아니라 해당 고을의 관리들도 처벌했다. 자리에 쫓겨나는 것은 물론 귀양까지 가야 했다. 자리에 쫓겨나는 것은 물론 귀양까지 가야 하기 때문에 행정 업무의 영속성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지방 토호나 기득권층이 활개를 치는 요인이 됐다. 이런 이유로 관리들 입장에서는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즉, 음주가 적발되면 덮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감시는 늘어나고

이처럼 지방관리들이 쉬쉬하는 것이 비일비재하면서 이번에는 이웃끼리 서로 끊임없이 감시하게 만들었다. 결국 관리들이 영조에게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영조실록 40년 7월 23일 “관에서 나오는 차사(差使)들을 대접하고 이웃집에서 술을 담그는가 살피느라 잇따른 소요 속에 벌벌 떨면서 여가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박절하게 이웃집까지 똑같은 죄를 주는 형률은 법을 신중히 하고 후세에 끼치는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고 밝혔다. 이에 정언 박상로는 금주령 폐단을 10조 조항의 문답 형식으로 상소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조는 크게 화를 내면서 금주령 때문에 중범죄가 줄었다고 자화자찬을 했다. 다만 영조시대 때 풍년이 들면서 쌀의 가격 하락을 걱정할 정도가 됐다. 결국 영조의 금주령은 손자인 정조에 들어와서 폐지됐다. 정조 스스로 술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금주령이 폐지되면서 정조시대 들어와서 다양한 술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방행정력 무너지면서

영조의 금주령이 앞서 언급한대로 중앙정부의 지방정부 통제권이 약화되게 만들었고, 오히려 지역 유지의 입김이 더욱 높아지게 만들었다. 이것은 19세기 세도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물론 영조와 정조 때 계속해서 암행어사를 파견했지만 통제가 더욱 이뤄지지 않으면서 지방 고을수령과 지역 유지와의 짬짜미가 늘어나면서 지방 고을수령은 ‘돈벌이’ 수단이 되면서 매관매직으로 이어졌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