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함흥공업지대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본토를 제외하고 아시아 최대 공업지대였다. 소련군이 한반도 이북을 점령할 때에도 한반도의 최대 중심지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군정사령부를 흥남에 설치하려고 했을 정도이다. 다만 부하의 설득으로 인해 평양에 설치하게 됐다.
흥남은 원래 조그마한 어촌이었지만 조선총독부에 의해 인위적으로 개발된 도시이다. 그러면서 함흥공업지대는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함흥공업지대는 일본 본토 이외의 최대 공업지대가 됐다.
산미증식계획 일환으로
1910년 무단통치시대를 겪은 조선총독부는 그 한계를 경험하고 문화통치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일본 본토에서 부족한 쌀을 공급하기 위해 산미증식계획을 세웠다. 문제는 쌀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비료가 필요했다.
이때 일본 본토의 ‘일본질소비료’ 회사를 주목했다. 노구치 시타가우가 1908년 창업한 일본질소비료 회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큰 경제적 이득을 얻었고, 1921년 암모니아 합성기술의 특허를 이탈리아부터 구매하면서 일본 최초 합성암모니아 공장을 가동하게 됐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조선땅에도 비료 공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에 일본질소비료에 조선에서의 사업을 제안했다. 그리고 그 편의를 봐주기 위해 수력발전소를 짓기로 한다.
수력발전은 물의 낙차를 이용해 모터를 돌려서 전기를 생산하는 방식이다. 이에 ‘제2차 발전수력조사’를 단행했다. 그 과정에서 개마고원에서 서해 쪽으로 흐르는 압록강 지류인 부전강과 장진강에 댐을 쌓아 인공호수를 만들고, 터널을 뚫어 물길을 동해 쪽으로 돌려 유연변경식 발전소를 건설하면 저렴한 비용으로 대규모 전기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에 두 발전소를 총괄하는 조선수전을 1926년 설립했고, 그 이듬해 조선질소비료 회사를 설립했다.
중일전쟁 발발하자
조선질소비료는 산미증식계획과 맞물리면서 성장을 해나갔다. 그런데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은 전시체제로 전환되게 됐다.
그러자 함흥공업지대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됐다. 기존에는 질소비료만 생산을 했는데 질소를 기반으로 한 다이너마이트 등 폭약을 생산하게 된 것이다.
또한 태평양전쟁 들어서면서 일본 본토는 미국 폭격기의 폭격 등으로 인해 물자를 제대로 생산하지 못하게 되자 함흥공업지대에서 ‘알루미늄’ 생산을 독촉했다.
그러면서 질소비료공장 이외에도 도쿄 이화학연구소 분실, 야금제련소, 제철소, 조선소, 각종 군수공장 등이 들어섰다.
이런 이유로 소련이 한반도 북부를 진격했을 때 군정 사령부를 함흥에 철치하려고 했다. 하지만 부하의 설득으로 인해 평양에 설치하게 되면서 평양이 중심지가 됐다.
그리고 1950년 6.25 전쟁이 벌어지면서 7월부터 8월까지 흥남을 철저하게 공중 폭격했다. 그 이유는 바로 함흥공업지대 시설을 파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흥남철수 당시 흥남부두를 모조리 폭파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