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친일파 윤덕영 그리고 벽수산장
[역사속 경제리뷰] 친일파 윤덕영 그리고 벽수산장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08.07 13: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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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대표적인 친일파라고 하면 ‘이완용’을 떠올리지만 실질적인 친일파는 ‘윤덕영’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윤덕영은 이완용이라는 이름에 가려졌지만 실질적인 매국행위를 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이유로 같은 친일파에서도 ‘가장 최고조의 친일행위’를 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고, 당시 일본인들조차 윤덕영의 친일행위에 대해 치를 떨었을 정도이다.

황후 치마 들춰내

윤덕영은 윤택영의 형이다.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지만 윤덕영의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윤택영의 딸이 황후가 되면서이다. 조카가 황후가 되면서 1908년 시종원경이 되면서 실권을 장악했다. 일본은 1910년 8월 22일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렷다. 이때 옥새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병풍 뒤에 숨어있던 순종 황제의 황후 순종효황후가 옥새를 들고 울면서 도망치다가 치마에 숨겼기 때문이다. 아무리 친일파라고 해도 황후의 치마를 들추는 것은 불경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나서지 못했다. 그런데 큰아버지 윤덕영이 나서서 치마를 들춰냈고, 옥새를 빼앗아 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그 공로로 선물을 받은 것이 ‘벽수산장’이다.

일본인도 치를 떨어

그 이후 1917년 일본인은 고종황제에게 도쿄로 가서 일본 왕에게 ‘한일합방에 대해 고맙다’는 말을 하게 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적임자로 이완용을 선택했다. 이에 이완용은 고종 황제에게 가서 이같은 요구를 했지만 고종황제는 나라를 빼앗겼을지언정 일본 왕에게 가서 절은 못하겠다면서 완강히 거부를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윤덕영이 나서기 시작했다. 윤덕영은 왕가 재산들에 직접 빨간 딱지 즉 압류를 가했다. 그래도 고종 황제가 거부를 하자 이번에는 고종황제의 과거 여성편력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했지만 계속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덕영은 집요하게 요구를 했고, 고종 황제는 순종 황제를 도쿄로 보내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이에 윤치호는 “저자의 친일은 영어로 뭐라 표현할 수가 없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일본사람들도 혀를 내둘렀다고 할 정도였다.

벽수산장

윤덕영은 친일파 중에서 가장 재산이 많은 사람이다. 벽수산장만 봐도 엄청나다. 집에는 능금나무밭, 자연숲, 한옥 99칸, 하천 등이 있어서 총 2만평에 달했다. 이는 이완용 땅의 4배이고, 축구장 8개 면적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옥인동의 약 54%, 서촌 부지, 수성동계곡, 배화여자고등학교, 인왕산 자락이 모두 벽수산장 터이다. 이밖에도 한일병탄의 공로로 자작과 매국 공채 5만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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