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길을 로마로 통한다.
유럽 문명을 대표했음에도 약한 리더십으로 멸망의 길로
1,000년의 유구한 찬란한 문화
[파이낸셜리뷰]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세계 제국을 이룩한 로마, 서양사에서 로마의 영향력은 엄청나게 크고, 해가 지지 않을 정도의 시공을 초월한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꾸준한 성장과 번영을 구가했다.
고대 로마(Roma antiqua)는 기원전 753년, 창건자 로물루스가 소수 이주 왕국으로 시작하여 에트루리아인의 휘하에 있다가, 힘을 길러 주변 국가들을 무너뜨리고 고대 카르타고, 헬레니즘 제국, 켈트 등을 정복했다.
로마의 발상지는 이탈리아 중부의 티베리스 강을 따라 팔라티누스 언덕의 마을이다. 주변 언덕들은 방어에 유리하며 비옥한 평원이 펼쳐진 교통로가 잘 발달된 곳이다. 로마 왕국은 공화정, 로마제국으로 이어가면서 476년 서로마 패망까지 유럽 문명을 꽃피웠다.
137년 로마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제국의 영역이 메소포타미아와 다키아 지역에까지 이르고, 템스강부터 티그리스강에 이르는 지역으로 명성을 떨치며 두려움과 존경을 동시에 샀다. 로마의 정치는 오늘날 제국주의의 근간이 됐고, 언어는 유럽 형성의 토대다.
그렇다면 작은 농경 국가였던 로마가 어떻게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는가?
첫째, 로마는 패장을 벌하지 않았고 패장 스스로가 진 이유를 잘 분석해서 다음 전투에 임하게 했다. 둘째, 로마는 패전국에 관대했다. 모든 관직과 시민권을 개방하였다.
로마는 주변의 민족들을 복속시켜 가면서 흡수하기보다 라틴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개방적인 로마의 태도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는데 일조한다. 넷째, 도로와 수로 건설에 힘썼다. 당시로서는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한 첨단 기법으로 정복지조차 기꺼이 로마 문명의 일부가 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가 천년 동안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은 타민족에 대한 개방성과 유연함 때문이었다.”라고 요약했다.
이민족에게도 로마시민권을 부여한 관용성, 피정복자의 문화까지 받아들이는 개방성,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하는 공존의 정신에서 로마제국 1000년의 뿌리를 찾았다.
그밖에 카이사르의 위대한 전략과 결단의 리더십, 그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의 균형감각과 포용 정신도 팍스 로마나 시대를 여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특히 로마의 평화를 이룬 것은 로마의 위대한 시민 정신을 빼놓을 수가 없다. 군 복무를 시민의 명예로운 의무로 삼았다. 명예가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던 로마인은 승리보다는 패배를 더 오래 기억하고 실패하면 그로부터 반드시 교훈을 얻었다.
서로마가 망하고 1453년 동로마가 소멸할 때까지도 서유럽에 대한 로마 제국의 통제력은 지속됐다.
로마가 고대에 천년, 중세에 천년을 견딜 수 있었지만 무능한 황제로 인해 혼란기가 찾아오고 끝내 멸망한다. 서로마 제국의 몰락 원인은 대부분 외부보다는 내부에서 온다. 무능한 지도자, 부패한 정부, 허약한 경제, 사회적 붕괴 등이 로마의 몰락에 기여했다.
혹자는 “로마의 멸망은 대부분 연구자들이 말하는 사치나 퇴폐가 아니었다. 성공에는 성공했기 때문에 치러야 하는 대가가 항상 따른다. 그것이 로마인들의‘혼미’였다. 적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것, 그것이 진정한 고뇌였던 것이다.” 그밖에 로마 멸망의 원인으로 잦은 이주와 야만인의 지속적인 침략, 정부 관리들의 부패로 인한 세금 징수와 집행의 어려움, 기후변화와 기근 등을 꼽는다.
전쟁의 승패는 경제력에 달려있고, 위기가 닥치면 그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간다. 오늘날 선진국의 조건이 무엇일까? 높은 1인당 국민소득, 민주주의, 성숙한 시민의식, 효율적인 교육과 의료 체계 등을 구비하고, 다수 국민이 사람답게 살 만한 나라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