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이후 정승화
정승화는 12.12 사건 당시 실질적 최고권력자인 계엄사령관이었지만 이튿날인 12월 13일 해임됐고, 보충역 이등병으로 강제예편 당했다. 이후 수감 생활을 해야 했다. 1987년 13대 대선 당시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대선 후보가 삼고초려를 해서 상임고문 겸 부총재로 영입됐다. 정승화의 정계 등단은 신군부 세력에게는 엄청난 압박이 됐다. 하지만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손을 뗐고, 계급 복권이 되면서 예비역 육군 대장 자격을 찾았다. 그리고 1988년 시작된 대한민국 제5공화국 청문회에서는 12.12 군사반란 당시의 피해자이자 증인으로 청문회에 출석해 증언을 했다. 1993년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김진기 육군본부 헌병감,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등 진압군 측 장군들이 전두환과 노태우 등 하나회 출신 인사들을 검찰에 고발했지만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기소유예 처리를 했다. 이후 신군부 측이 오히려 진압군 장군들을 무고 혐의로 역고소를 했지만 이 역시 기각됐다. 1995년 전두환과 노태우가 구속 되면서 증인으로 채택돼 증언했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무기징역을 받았다. 하지만 1997년 김영삼 대통령이 특별사면으로 전두환과 노태우가 사면복권되자 “반성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풀어준다니 법치국가인가”라면서 분노룰 표출했다.이건영, 녹음테이프 폭로
12.12 군사반란 당시 이건영 3군사령관은 신군부와 진압군의 충돌을 최대한 막으려고 노력했다. 이건영 사령관은 신군부를 ‘반란군’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아군간의 교전과 유혈사태, 그 틈에 북한군이 남침할 수 있다면서 신군부 진압을 위해 전방부대 병력 동원에 반대를 했다. 이것은 당시 어떤 사령관이 3군사령관으로 있어도 해야 할 조치였다. 하지만 결국 보안사에게 체포됐다. 그리고 군복을 벗었다. 군복을 벗은 이유는 진압군으로 조직적 저항을 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후 1995년 8월 12.12 군사반란 당시 이건영을 중심으로 한 전화통화 육성 녹음 약 1시간 15분가량이 조선일보를 통해 세상에 공개됐다. 해당 녹음본은 보안사령관에서 감청한 녹음본인데 훗날인 1995년 기무사 직원이 해당 녹음을 듣고 “군대 출동하지 말라”는 이건영의 지시에 감복해서 이건영에게 넘겨줬다. 그리고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이건영은 녹음본을 공개하면서 군사반란을 막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을 전했다.쓸쓸한 말로 정병주
진압군 중 한 사람인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12.12 사건 당시 자신이 아끼던 박희도 제1공수특전여단장, 최세창 제3공수특전여단장 그리고 장기오 제5공수특전여단장이 반란을 일으킨 하나회 소속 장교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곧바로 9공수를 출동시키려고 했다. 이 사실을 군 통신망을 감청하고 있던 보안사에 들어가고, 하나회는 제3공수특전여단장 최세창에게 정병주를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반란군들은 특전사령관실에서 김오랑 소령과 총격전을 펼친 후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했다. 이 과정에서 김오랑 소령은 사망하고,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팔에 부상을 입었다. 강제예편 후 12.12 군사반란에 대한 국내외 자료를 수집하면서 부당성을 주장했다. 1987년에는 신군부 만행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1988년 행방불명 되더니 다음해 싸늘한 죽음으로 발견됐다. 그의 죽음을 자살로 종결지었지만 자살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다.반란군 때려잡겠다는 장태완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자 반란군에 전화를 해서 “마, 너거한테 선전포고다 인마! 난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라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백방으로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부하의 배신으로 체포된다.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쫓겨났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막걸리로 끼니를 대신하다가 1980년 4월 별세하고, 1982년에는 외동아들(당시 21세)이 행방불명됐다. 이에 평생 죄책감에 살았다고 전해진다. 다만 신군부도 장태완 사령관을 어찌하지 못해서 전두환이 공기업인 한국증권전산 사장에 임명하고, 장태완 사령관은 이를 수락했다. 민주화 이후 1993년 회고록을 집필했고,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 경선에서 승리를 했으며, 1996년 김영삼 정권이 5·6공화국 정권 비리 및 12.12 군사반란, 5.17 내란의 책임을 물어 전두환과 노태우를 잡아들이자 증인으로 채택됐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인재영입으로 정계에 뛰어들었다.김오랑 소령과 그의 부인
김오랑 소령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신군부가 불법체포하려고 하자 저항하는 과정에서 사망했다. 당시 35살. 이후 1990년 중령으로 추서됐고, 2014년 보국훈장이 추서됐다. 다만 김오랑 중령의 부인 백영옥씨는 남편의 죽음 이후 충격으로 시신경 마비가 되면서 실명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뤄지자, 남편의 명예를 바로잡기 위해 나섰다.백씨는 1990년 12월 당시 현직인 노태우 대통령, 전두환 전 대통령과 군사반란 장교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려 했지만 소송을 포기했고, 1991년 6월 28일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경찰은 실족사로 결론지었다. 그의 부모님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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