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0채 잿더미로
1426년 2월 15일 인순부의 종 장룡의 집에서 방화로 추정되는 불이 났고, 불어온 서북풍을 타고 맹렬히 번지면서 하루동안 집 2200채가 잿더미가 됐고, 32명이 불에 타죽었다. 세종대왕은 강원도 횡성에 있었기 때문에 보고를 받고, 진두지휘를 할 수 없었다. 세종대왕은 연락을 받자마자 바로 환궁했다. 방화이기 때문에 결국 체포령이 떨어졌고, 여러 사람이 체포됐다. 그중에 누가 범인인지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당사자 모두 능지형에 처해졌고, 가족들 중에 남자들은 교형에 쳐해지고, 처와 딸은 노비가 됐다. 이재민들에게 구호 양곡을 나눠줬다.한양에도 소방 시스템을
이날 화재를 계기로 한양에도 소방 시스템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단 길을 넓히는 작업을 했고, 방화장(防腐墻)을 쌓게 했다. 도한 개인집에는 5간, 10간마다 우물을 파도록 했고, 종묘와 대궐 안, 종루의 누문에는 소화기를 비치하도록 했다. 아울러 병조 예하에 금화도감을 설치해서 화재 예방을 하게 됐다. 금화도감이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설치된 소방기관이었다. 금화군은 높은 종루에 올라가 화재를 감시하고, 화재 발생 시 출동해서 불을 끄는 활동을 했으며, 방화범을 잡는 업무까지 했다. 금화군은 삼베를 길게 잘라 막대기에 이어 물을 적셔 사용하는 ‘불채’와 쇠갈고리, 화재 현장에 진입하기 위한 도끼 등을 소지했다. 금화군의 방울소리가 울리면 백성들은 화재에 대비하기 위해 집집마다 물을 길러 담아두는 등 화재에 대비했다고 한다. 금화군 창설 이후 한양에서는 이전과 같은 대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