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가가 된 금세공업자
뱅크런의 시초는 17세기 영국으로 올라간다. 당시 ‘금(金)’ 자체가 돈이 되던 시대였다. 하지만 금은 가지고 다니기 무거웠을 뿐만 아니라 보관도 불편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금을 녹여서 만든 화폐, 즉 금화를 제조했고, 이것을 화폐로 통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금화 역시 집안에 보관하거나 휴대하기 불편했다. 금화를 집안에 보관할 경우 분실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금 소유자들은 자신의 금화를 보관하는 방법으로 금세공업자의 금고를 빌렸다. 금세공업자는 커다랗고 튼튼한 금고를 가지고 있었고, 금화를 보관하기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금세공업자에게 금화를 가져다주면 금세공업자는 보관증을 써줬다. 보관증에는 언제든지 보관증을 가져오면 금화를 내주겠다는 약속의 내용이 들어있었다. 사람들은 금화 대신 보관증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금보다 가벼울 뿐만 아니라 휴대하기 편하고 금세공업자에게 가져다주면 언제든지 금화로 바꿀 수 있기 때문에 금 보관증이 화폐 역할을 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날 금세공업자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람들이 자신이 맡긴 금화를 한꺼번에 찾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에 금세공업자는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맡겨둔 금화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이자를 받기로 한 것이다. 대출만 잘 회수된다면 금 소유자들은 눈치를 채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금세공업자는 막대한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금세공업자가 갑자기 많은 돈을 버는 것에 대해 수상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자신의 허락도 없이 금화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에 사람들은 금세공업자에게 몰려가 항의를 했는데 금세공업자는 재치를 발휘해 받은 이자의 일부를 나눠주겠다고 밝혔다. 금 소유자들 입장에서는 금고에 넣어놓기 보다는 대출을 해서 돈을 벌 수 있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에 그것을 허락했다.욕심이 부른 지급준비율
이렇게 금 소유자들로부터 허락을 받아서 대놓고 금화 대출을 했던 금세공업자는 더욱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금고에 금화가 얼마나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금 보관증을 남발하기 시작했다. 금 세공업자가 화폐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것이다. 금세공업자는 그동안 대출해간 정보를 취합해보니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10%의 금만 찾으러 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금고의 금보다 10배나 많은 보관증을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금세공업자는 존재하지 않은 금화의 이자수입까지 받아내면서 결국 엄청난 부를 축적한 은행업자로 변신을 했다. 하지만 자신의 금화로 돈놀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금 소유주들이 은행가로 변신한 금세공업자에게 가서 자신의 금을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금화를 모두 가져가버렸다. 이것이 뱅크런이다.영국 왕실과 결탁한 은행가들
뱅크론으로 인해 은행업자들이 위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당시 오랜 전쟁으로 인해 많은 금화가 필요했던 영국 왕실이 ‘은행업자’들의 영업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영국 왕실은 은행업자들에게 ‘가상의 돈을 만들어 대출 영업을 할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을 허락했다. 은행에 ‘Chartered’(면허받은 혹은 공인된)라는 말이 들어간 것은 ‘정부로부터 가상의 돈을 찍어 낼 수 있는 면허를 받았다’는 의미다. 영국 왕실은 금 보유량의 3배까지 대출할 수 있게 허락을 했고, 은행업자와 영국 왕실 간의 긴밀한 관계가 시작됐다. 잉글랜드은행이 이렇게 설립이 됐고, 왕실은 전쟁을 위해 돈을 빌렸고, 전쟁을 통해 무역로가 확보되고 영토가 확장됐다. 은행은 금세공업자가 했던 전례에 따라 10%의 지급준비율을 이용했고, 정부의 허가가 있기 때문에 돈을 마음대로 불리게 되면서 현대의 은행으로 탈바꿈했다. 한편, 금화를 대출해서 비즈니스를 하는 곳이기 때문에 ‘금행’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동양권은 왜 금행이 아닌 은행이라고 불렀나 하면 동양권 즉 아시아는 당시 은본위 체제였기 때문이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