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조선시대 재산상속의 변화
[역사속 경제리뷰] 조선시대 재산상속의 변화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3.30 10: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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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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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흔히 조선시대 재산상속을 떠올리면 ‘장자 상속’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상 장자상속을 시행한 기간은 얼마되지 않는다. 임진왜란 전에는 남녀 균분 상속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는 고려시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고려시대는 남녀 균분 상속을 원칙으로 했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남가가 결혼할 때 ‘장가간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장가간다는 표현은 즉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있는 처갓집으로 간다는 뜻이다. 즉, 처가살이를 했다. 일명 데릴사위다.

경국대전에는 남녀 균분 상속

조선시대가 들어서면서 초기에는 남녀 균분 상속을 원칙으로 내세웠다. 조선시대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에서는 똑같이 부모가 가진 돈, 토지, 집 등의 재산을 상속할 수 있었다. 재산상속은 보통 ‘분재기(分財記)’라고 하는 형식으로 나누었다. 분재기 형식은 다양했는데 자신이 죽을 때 나눠주는 것도 있고, 과거에 합격했거나 자녀를 낳았거나 하는 등 경사가 있을 때 별도로 주는 형식도 있었다. 경국대전 형전에는 ‘개인노비’와 관련된 기록이 있는데 ‘분배하지 못한 노비는 아들딸이 살았거나 죽었거나 간에 나눠준다’고 돼있다. 세종대왕은 신하들에게 “부모의 재산을 모두 차지할 욕심으로, 혼인한 여자 형제에게 재산을 나눠 주지 않는 자는 엄히 벌하라”는 전교를 내리기도 했다. 남녀가 재산을 균등하게 상속을 받으면서 제사를 아들딸이 돌아가면서 지냈는데 이를 ‘윤회봉사(輪回奉祀)’라 불렀다.

장가간다의 대표적인 사례 신사임당의 남편

즉, 조선시대 초기만 해도 재산을 남녀가 균등하게 상속 받았기 때문에 ‘장가간다’는 표현을 조선시대 초기만 해도 흔한 표현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율곡의 아버지인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이다. 이원수는 연산6년(1501년)~명종 16년(1561년)까지 산 사람으로 임진왜란 이전 사람이다. 덕수 이씨 출신으로 신사임당과 혼인해 초기에는 데릴사위로 살았다. 이율곡이 어린 시절 강릉에서 보낼 수 있었던 것도 이원수가 신사임당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는 임진왜란 직전까지만 해도 남녀 균분 상속이 가능했고, 남자가 여자 집에서 사는 것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남녀 균분 상속이 깨지면서 장자 상속으로 변화됐다.

장자상속의 대표적인 사례 윤선도 집안

남녀 균분 상속에서 장자 우선 상속의 사례로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윤선도 집안 이야기다. 고산 윤선도는 해남 땅에서 가장 큰 부자였고, 이를 바탕으로 어부사시사 등과 같은 문학작품을 남긴 인물이다. 윤선도 선조는 원래 강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해남땅은 대부분은 해남정씨의 소유였다. 그런데 윤선도의 고조부 어초은 윤효정이 해남 정씨의 딸과 혼인했다. 혼인할 당시 재산 상속에 대해서 해남 정씨는 자손 균분 상속을 원칙으로 하면서 해남 윤씨에게 시집 간 딸에게 논밭을 떼어줬다. 처갓집 덕분에 큰 부자가 된 어초은 윤호정은 일찍이 장자 상속을 시행하면서 윤씨 집안의 유산으로 남기게 되면서 해남 윤씨의 자산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됐다. 이처럼 부모의 재산을 남녀 균분 상속에서 장자 상속으로 변화되면서 조선 후기에는 ‘사내아이’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상이 뿌리를 내리게 됐다. 그것이 현대에 들어와서 깨지기 시작했고, 현대에는 남녀 균분 상속으로 바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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