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49년 4월 4일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이하 나토)가 창설됐다. 북미와 유럽 등 서방국가의 군사동맹으로 본부는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 위치해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소련이 동유럽을 모두 공산화하자 서방국가들이 위협을 느꼈고, 이에 군사적 동맹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에 베를린 봉쇄가 진행 중인 1949년 나토가 창설된 것이다. 창설국가는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이탈리아,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 포르투칼 등 서방국가이다.
베를린 봉쇄로 대부분의 국가 참여
소련이 베를린 봉쇄를 단행하자 위기감을 느낀 서방국가들의 대부분이 창설국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1952년 2월 18일 그리스와 터키가 가입했는데 터키가 가입하게 된 것은 1950년 한반도에서 6.25 전쟁이 터지자 터키는 한국전쟁에 UN군의 일원으로 파병을 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나토에 가입하게 됐다. 그리고 1955년 서독이 공식 가입하면서 소련의 저지를 막는 방패역할을 하게 됐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후 스탈린 통치 하에서 숨통을 너무 옥죄고 살았던 소련인들로서는 서구 유럽과 잘 지내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154년 3월 나토 가입을 신청하기도 했다. 이에 나토 회원국들은 격론 끝에 반려했다.
그런데 흐루쇼프가 후계자가 되면서 동유럽 민주화 움직임을 탄압하고 군비를 증강하면서 냉전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면서 동유럽 위성국가들을 모아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창설했다.
사실 나토군이 실전에 참전한 것은 냉전 시기에는 없었다. 다만 소련이 붕괴된 후 유고 내전 당시 코소보 전쟁 때 나토군이 개입을 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해체됐지만
소련이 붕괴되면서 사실상 냉전은 끝났다. 원래 소련의 유럽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만든 기구이기 때문에 나토는 더 이상 소용이 없었지만 해체되지 않았다.
동유럽 위성국가들을 모아서 세운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소련이 붕괴되자 해체된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오히려 나토는 동유럽으로 확장했다. 빌 클린턴 정부가 들어서면서 나토는 동유럽으로 그 기세를 확장시켰다.
독일 수상 헬무트 콜 역시 나토가 동유럽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에 체코, 헝가리, 폴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북마케도니아 등이 나토에 합류했다.
이제는 나토에 가입되지 않은 유럽 국가를 손으로 꼽을 정도로 나토 가입이 이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
우크라이나는 소련이 붕괴된 직후 소련으로부터 독립했다. 그러면서 나토 가입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
다만 러시아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나토 가입이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우크라이나 내에 친러파의 영향력이 감쇄되면서 나토 가입 논의가 재추진됐다. 그리고 국민 여론도 압도적으로 지지하게 됐다.
러시아는 당연히 크게 반발했고,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막으려고 했다.
2022년 러시아가 나토 확장 핑계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전쟁 발발 하루만에 우크라이나는 공식적으로 나토 가입을 요청했다.
본래 나토가 소련의 확장에 대해 반대하기 위해 만든 군사기구이라는 점에서 우크라니아 사태는 서방국가로 하여금 나토의 중요성을 일깨우게 만들기 충분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전면적으로 확대되면서 나토 회원들 간에 심각한 위기 의식이 발동했고, 러시아 제재,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 등 단합된 목소리를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