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목욕탕
[역사속 경제리뷰] 목욕탕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6.21 13: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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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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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22일부터 만 4세(48개월) 이상 어린이는 이성 부모를 따라 목욕탕에 들어갈 수 없게 된다. 예컨대 4세 이상 남성 아이는 엄마 따라 여성 목욕탕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건복지부는 이 같은 내용의 ‘공중위생관리법’ 시행규칙 일부 개정안을 22일부터 시행한다고 21일 밝혔다. 이는 어린이 발육 상태가 과거보다 좋아지면서 출입 관련 민원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지난 1월 해당 개정안을 입법예고하면서 22일부터 본격 시행에 들어가는 것이다.

고대 로마는 목욕탕 문화

고대 로마는 그야말로 목욕탕 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욕탕 문화는 인류와 함께 했다. 인더스 문명의 중심지인 모헨조다로 유적에서는 대규모의 공중 목욕탕 유적이 발견된 것이 그 증거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온천에서 목욕 문화가 생겼고, 목욕을 자주하면 건강에 좋다고 생가했다. 원래 강이나 바다에서 목욕하던 고대 로마인들은 그리스식 목욕에 매료되면서 목욕탕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부유한 귀족들은 집안에 목욕시설을 갖췄고, 로마 시민들은 공중목욕시설을 만들어 즐겼다. 다만 현대와 같은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을 수시로 교체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기생충이 번식해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은 목욕을 즐겼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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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는 왜 목욕탕이 사라졌을까

로마가 멸망하고 봉건사회가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서구 유럽 사람들은 목욕 문화를 즐겼다. 다만 공중목욕탕의 용도가 다른 용도로 사용됐다. 그것은 매춘의 장소가 됐다. 매춘의 장소가 되면서 매독이 급속도로 빠르게 전파됐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목욕탕 출입을 끊으면서 그에 따라 목욕 문화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게다가 위생 관리가 엉망이었기 때문에 공중목욕탕에 들어가기 보다는 차라리 안 씻는 것이 전염병으로부터 안전하다는 인식을 하게 됐다. 근대에 들어와서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목욕 시설에 대한 기술은 발달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근대에서도 목욕하는 문화가 정착하지 못했다. 오히려 로마의 공중목욕탕 문화를 이어온 것이 터키다. 이른바 터키탕이 그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동로마제국의 수도가 이스탐불(콘스탄티노플)이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거치면서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공장 노동자들은 위생 관념이 아예 없었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가정은 대부분 한 건물에 여러 가구가 모여 사는 시스템이고, 각 가정에는 욕실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일주일에 한 번 부엌이나 벽난로 앞에 양철 욕조를 가져다놓은 후 거기에 물을 따로 데운 걸 부은 뒤 안에 들어가 비누로 목욕하고 남은 목욕물은 양동이에 따로 퍼서 버리고 욕조도 방에서 치워야 했다. 살인적인 노동시간이 앞에 닥친 노동자 입장에서는 목욕할 시간이 아예 없었다. 물을 데우거나 물을 버릴 수 있는 시간을 아낀다면 그만큼 목욕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되기 때문에 공중목욕탕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에 바닷물로 씻을 수 있는 대중탕이 리버풀 부둣가에서 문을 열기 시작했다. 당시 콜레라가 창궐했는데 대중목욕탕의 출현으로 질병의 위험에서 해방됐고, 공장 노동자도 얼마든지 더운 물로 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공중목욕탕에 대한 인식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샤워시설이 개발되면서 서구유럽 사회에서 막대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의 경우 호텔이 들어서게 되고, 호텔이 개인 욕조를 비롯한 샤워시설을 구비하면서 그때부터 목욕이 훨씬 수월해졌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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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의 문화 코리아

우리나라는 목욕과 연관된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혁거세 신화나 김알지 신화에서는 박혁거세나 김알지가 알에서 태어났는데 냇가에서 씻기자 광채가 났다고 기록했다. 이는 종교적 의미로의 목욕을 의미한다. 불교가 전래되면서 ‘목욕재계’라는 말이 나왔다. 불교의 영향으로 인해 사람들이 몸을 자주 씻었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불공을 드리기 전에 신도들은 몸을 깨끗하게 씻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정방이라는 실내 목욕소를 두기도 했다. 왕실은 온천을 다녀왔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서 쉽게 발견한다. 온양에는 행궁을 만들었다. 양반은 주로 집에서 목욕을 했지만 일반 서민들은 시냇가에서 멱을 감는 식으로 목욕을 했다. 시냇가에서 멱을 감을 때에도 남성 여성 따로 멱을 감았다. 아울러 꽃물, 쌀겨, 조두 등 비누 대용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수세미 역시 목욕기구로 사용했다. 서양사람들이 조선땅을 처음 방문했을 때 가장 깜짝 놀랐던 것 중 하나가 시냇가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남녀노소가 목욕을 즐기고 있다는 기록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현대식 최초 대중목욕탕은 1905년 서울 서린동에서 열었는데 당시에는 모르는 사람들끼리 발가벗고 목욕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서 문을 닫았다. 하지만 점차 대중목욕탕이 정착됐는데 그것은 도시화가 되면서 도시로 이주했던 많은 사람들이 평소에도 개울가에서 멱을 감았던 풍습 때문에 목욕탕을 가야 직성이 풀릴 정도가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방 이후 이태리타올과 목욕관리사가 생겨나면서 일본식 목욕문화와 차별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찜질방이 탄생했다. 찜질방은 단순히 목욕과 스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체험을 할 수 있는 종합엔터테인먼트식 목욕문화를 체험하는 장소가 됐다. 찜질방이 들어서고, 워터파크 등이 들어서면서 대중목욕탕은 점차 설자리를 잃어버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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