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개판 오분전 그리고 삼백산업
[역사속 경제리뷰] 개판 오분전 그리고 삼백산업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6.30 13: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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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셔리뷰=어기선 기자] 우리가 알고 있는 ‘개판 오분전’이라는 표현은 ‘개가 많아서 엉망’이라는 것으로 알기 쉽지만 원래 뜻은 6.25 전쟁과 연관이 돼있다. 6.25 전쟁 당시 많은 피난민이 부산으로 모여들었다. 부산 국제시장에는 많은 피난민들이 모였는데 급하게 피난을 하느라고 재산을 챙기고 올 수 없었던 사람들이 밥을 굶어야 했다. 이런 피난민들에게 UN이나 미군이 지원한 식량 원조로 배를 채우게 했는데 원조 받은 쌀이나 옥수수 등을 커다란 솥에 삶아서 죽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흔히 ‘꿀꿀이 죽’이라고 불렀다.
이때 배급을 준비하기 전인 5분 전에 “개판 오분 전(開版五分前)”이라고 외쳤다. 그러자 배고파 굶주린 피난민들이 밥을 배급받기 위해 몰려들면서 아수라장이 됐고, 이걸 비유해서 ‘개판 오분전’이라는 표현이 나왔다는 속설이 있다.

미국의 원조는

미국의 우리나라에 대한 원조는 1945년 9월 미군에 의한 ‘점령지역 행정구호계획(GARIOA)으로부터 출발했다. 미군정 하에서 우리나라 경제의 인플레이션 억제와 긴급구호를 위해 제공됐고 총 4억 900만달러였다. 물론 장기적인 경제부흥을 위한 경제원조도 있었지만 한국전쟁으로 중단해야 했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전시긴급구제계획(SEC) 원조로 명칭이 바뀌었고, 주로 쌀이나 옥수수 등으로 원조가 됐고, 앞서 언급한 개판 오분전과 같은 일화가 탄생하게 됐다. 전체 규모는 각기 4억 5,700만 달러와 1억 2,200만 달러였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미국, 무상으로 식량 원조

휴전이 되면서 본격적인 원조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더욱이 미국은 1956년부터 잉여 농산물을 우리나라에 무상으로 원조했다. 미국이 무상으로 원조한 이유는 미국에서 남아도는 잉여농산물을 소진시킴으로써 미국 내 농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또한 한미 합동경제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한국정부가 원조물자를 팔아서 마련한 돈을 어디에 쓸 것인지 결정하는 권한을 갖게 됐다. 그 결과 원조 물자 판매 대금 상당 부분을 미국산 무기를 구입하는데 사용했다. 즉, 미국으로서는 식량을 무상으로 원조함으로써 자국 내 농민들을 보호하는 것은 물론 자국내 방위산업을 성장시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왔다.

삼백산업의 태동

미국은 우리 정부에게 식량을 팔아서 대금을 마련하고, 그것을 다시 무기 구입으로 사용하라고 하면서 이승만 정부는 미국이 무상으로 원조한 밀가루, 설탕, 면화를 일반 국민이 아닌 기업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팔았다. 어차피 무상으로 원조 받은 것이기 때문에 기업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팔았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제분공업협회·대한방직협회·대한제당협회를 결성, 각 협회가 제조업자를 대표해 원료도입자금의 불하를 받아 이를 각 산하기업에 분배했다. 그러면서 카르텔이 형성됐고, 새로운 업체의 신규 가입이 제한되면서 원료를 독점하게 됐다. 이에 막대한 이익을 얻으면서 오늘날 재벌이 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포화상태에 놓여

미국의 식량 무상 원조와 삼백산업이 비약적 발전은 포화상태에 빠지게 했다. 미국이 무상으로 쌀, 밀가루, 설탕, 면화를 원조하면서 시중에 쌀이 풀리게 되면서 농촌 경제는 그야말로 파탄에 이르렀다. 수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나아가야 했다. 그러다보니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도시 빈민도 늘어나게 됐다. 그러면서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미국이 갑자기 원조 방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무상 원조를 축소하고 개발 차관 기금을 형성해서 유상 차관 정책으로 전환하려고 한 것이다. 기업들 입장에서는 거의 무상으로 원료를 공급받았다가 어느날 갑자기 비싼 돈을 주고 원료를 구입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이승만 정권 역시 당혹스러운 것은 마찬가지. 이런 이유로 산업에 대한 재편이 불가피해졌다. 이에 산업 구조의 불균형 해소, 대외 의존도 감소 등을 목표로 한 ‘경제개발 3개년 계획’ 수립에 착수했다. 하지만 산업 구조를 단기간에 재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고, 삼백산업이 전반적인 침체를 겪으면서 이승만 정부 당시 경제성장률도 침체에 이르게 됐다. 그러면서 국민들의 불만이 쌓여가는 상황 속에서 3.15 부정선거가 발생하면서 4.19 혁명이 발발한 것이다. 3.15 부정선거 당시 민주당의 구호가 “못살겠다. 갈아보자”라고 한 것도 미국의 무상원조에 따른 농촌의 붕괴, 그리고 삼백산업의 침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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