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감에 휩싸인 재한 일본인
재한일본인들은 그야말로 공포감에 휩싸였다. 그러면서 8월 16일 일본인 공무원 상당수가 근무이탈을 했다. 서울특별시 내 일본인 부윤 스치 게이고 외 일본인 직원의 근무이탈로, 김창영을 부윤, 이범승을 부부윤으로 하여 행정공백을 해소했다. 재한일본인들도 ‘광복’이 올 것이라고는 예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재한일본인들은 8월 16일 많은 조선인들이 쏟아져 나오자 “이렇게 많은 조선인들이 있는 줄 몰랐다”고 회고를 했다. 재한일본인 2세는 해방되기 전까지만 해도 조선땅은 자신이 살고 있는 일본땅으로 알았다고 회고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수많은 조선인들이 쏟아져 나올 때 경악했다고 한다. 재한일본인들이 광복 다음날인 16일 근무이탈을 한 이유는 조선인들로부터 보복폭행을 당하지 않을까는 우려 때문이다. 실제로 16일부터 23일까지 1주일 동안 우리나라 전역에 보고된 각종 사건은 913건이다. 조선총독부는 신사와 일왕 사진을 불태우라고 지시를 내린다. 그것은 조선인들에 의해 신사와 일왕 사진이 불태워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한반도 이북은 더욱 심해
한반도 이북은 더욱 심했다. 소련군이 한반도 이북을 점령하자 재한일본인의 재산을 빼앗고는 재한일본인을 강제노역장으로 끌고 갔다. 이대로 가면 재한일본인은 모두 강제노역장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반도 이남을 점령한 미군은 일본인들을 일본으로 송환시킨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그때부터 필사의 탈출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으로 가기 위해서는 결국 한반도 이남으로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넘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대탈출이었다.일본인 송환 꺼렸던 일본 정부
한반도 이남에 남아있던 재한일본인이나 한반도 이북에서 탈출한 일본인 모두 자신이 일본으로 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들의 송환을 꺼리기 시작했다. 미군은 이들을 일본으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일본 정부는 생각이 달랐다. 왜냐하면 이미 원자폭탄을 두 번이나 맞아서 폐허가 된 국토였고, 경제적 기반도 아예 없었다. 재한일본인을 받아줄 처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미군 역시 일본인의 송환은 허용했지만 이들이 재산을 들고 일본으로 가는 것은 꺼려했다. 그러면서 정식 송환선에는 재산 1천엔만 가지고 갈 수 있었다. 사실상 아무 것도 갖고 일본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각자도생하기 시작한 재한일본인
재한일본인은 각자도생하기 시작했다. 광복된 다음날 처음에는 자신들이 일본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은행에 가서 돈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조선 고물상들이 일본인 집으로 드나들기 시작했고, 일본인들은 시중보다 저렴하게 물건을 팔아치우고 현금을 마련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송환을 꺼리고 있고, 미군 역시 송환선에 많은 재산을 갖고 탈 수 없다고 하면서 낙담을 하기 시작했다. 일부 일본인은 밀항선을 구해서 밀항을 하기 시작했지만 재한일본인 중에는 일본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그해 9월 12일 서울 소공동 YMCA 청년회관에는 일본인 학생, 부인, 노인 등 남녀노소가 가득 모였다.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서이다. 이제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날부터 3개월 과정으로 매주 3번, 오후 4시부터 90분간 진행됐다. 그때부터 재한일본인은 각자도생을 하기 시작했다. 일본인의 성(姓)을 버리고 한국인의 성(姓)을 취하면서 한국 사람으로 바꾼 일본인도 있었다. 이들은 조선인들이 운영하는 이발소나 목욕탕, 음식점 등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일본인 교사는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의 집에 식모로 들어가기도 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일본인들은 자신들끼리 마을을 이뤄 생활하기도 했다. 이에 아직도 일부 마을은 일본인 마을로 불리기도 한다. 그렇게 재한일본인은 점차 한국인으로 동화되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