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몽 연합군 물리친 태풍
카미카제는 ‘신의 바람’, ‘신이 일으킨 바람’을 뜻하는데 1274년 몽골 제국,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이 주도한 몽골-고려 연합군의 일본원정에서 이들이 바다를 건너오던 중 두 차례나 태풍을 만나 좌절한 것을 두고 신이 준 바람에 의한 것이라고 붙인 것에서 유래됐다. 당대 최강의 군사력과 고려의 해군이 합쳐서 일본으로 쳐들어갔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그런데 태풍 때문에 일본땅을 상륙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 입장에서는 고마운 바람인 셈이다.왜 카미카제 선택했나
일본은 진주만 공습으로 미 해군의 태평양 함대에 크게 타격을 줬다. 이로 인해 일본은 아시아는 물론 태평양으로 확장할 수 있었다. 미군은 연전연패를 하면서 크게 위축됐다.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미 해군은 압도적인 열세를 보였다. 어떤 사람이 보더라도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의 승리를 점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미드웨이 해전에서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다. 기존에는 전투기와 전투기 간의 싸움이었다면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전투기가 전투기를 뚫고 들어가서 배에 폭탄을 떨어뜨려 타격을 주는 방식이 됐다. 이로 인해 일본 항공모함 4척 중 3척이 5분만에 격침됐다. 항모가 모두 격침되면서 일본군은 점차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구축함 등은 여전했다. 하지만 대공권을 상실한 일본 구축함은 미 해군의 먹잇감밖에 되지 못햇다. 미국은 진주만 공습 이후 빠르게 기술개발과 생산에 힘을 쏟으면서 일본 해군과의 물자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됐다. 미국의 전투함이 격파되면 그 다음 전투함이 빠르게 투입됐지만 일본 해군의 사정은 달랐다. 그러다보니 점차 일본 해군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전쟁의 양상은 빠르게 미군의 승리로 기울어졌다. 일본으로서는 미국 전함에 유효 타격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카미카제가 고안된 것이다.하지만 치명적인...
카미카제는 시행되기 1년전부터 구상해오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미친 계획이라면서 이를 시행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마리아나 제도가 상실되자 일본 해군 중장 오니시 타키지로(大西瀧治郞)는 필리핀 방어전을 준비하고자 마발라캇 기지에서 자신이 지휘하는 제201해군항공전대의 인원들을 차출, 10월 20일 자살특공부대를 최초로 조직했다. 이들은 A6M 제로센에 250Kg 폭탄을 적재한 채로 적함에 들이받도록 훈련받았고, 같은달 25일 레이테 만 해전에서 최초로 카미카제를 시행했다. 이 전투에서 미 해군은 엄청난 타격을 입으면서 그때부터 카미카제가 일본 해군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일본군은 카미카제를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미 해군의 기술적 우위는 점해졌고, 일본과의 격차는 벌어졌다. 그 이유는 F6F 헬캣, VT신관, 레이더 CIC 등의 개발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아울러 미 해군 방공전술도 발전하면서 일본 전투기가 전함에 다가오기 전에 격추됐다. 사실상 카미카제가 성공할 확률이 점차 낮아진 것이다. 아울러 일본 해군에서도 치명적인 실수가 나온다. 그것은 전투기를 조종해보지 못한 사람들을 전투기에 태운 것이다. 이미 미 해군의 방공능력이 뛰어난 상태에서 전투기를 조종해보지 못한 사람을 전투기에 보내서 자살공격을 시행하려고 했으니 미 전함에 닿기도 전에 격추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일본 군인들도 만류
카미카제는 당시 일본 군부 내에서도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자살특공대를 만들어 적(미국)에 보내는 작전에 대해 일본 군인들도 “누가 만든 작전이냐”면서 반대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군부 핵심 지휘자들은 카미카제에 태울 사람들을 모집했다. 물론 명목은 ‘자원’이었지만 어떤 사람이 죽으러 가는 길을 자원할 리가 없다. 결국 강제적으로 모집했는데 그 중에는 조선사람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비행기 태워준다고 유혹을 해서는 결국 전투기 몇 번 조종해보고 난 후 자살을 하라고 강요한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