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문송면군은 1973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태안중학교 졸업반 학생이었다. 즉 15세 어린 나이였다.
집안 사정 때문에 낮에는 일하고 야간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광고를 보고 서울로 상경했다.
1987년 12월 5일 그가 입사한 회사는 협성계공으로 온도계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문송면군이 하는 작업은 액체 수은을 온도계에 주입하는 간단한 일이었다.
일하자마자 나타난 이상증상
일을 시작한지 한달이 조금 넘은 시점에서 이상 증후가 나타났다. 불면증, 식욕감퇴, 바렬, 두통 등이었다.결국 문군은 휴직을 결심했고, 1988년 1월 20일 휴직계를 회사에 제출했지만 회사에서는 공장 근무로 인한 상해가 아니라는 각서를 요구했다. 이에 문군은 다시 근무를 시작했지만 보름만에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자 휴직계를 제출했다. 그리고 노동의 대가로 받은 돈은 7만 5천50원이었다.
서울에 있는 형과 누나의 간호를 받았지만 호전되지 않자 결국 부모님이 있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내려오자마자 전신발작을 일으켰고, 읍내 병원에 입원했다가 3일 후 고대 구로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세가 호전되지 않으면서 부모들은 3ㅇ월 9일 서울대 병원 소아병동에 원했다. 병이 발생한 원인 즉 병원(病原)을 찾지 못한 주치의 박희순은 문군의 과거력을 되짚기로 했다. 가족들은 온도계 공장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온도계 공장 일한 사실 드러나면서
주치희 박희순은 그제야 혈액 및 모발을 채취해 수은 중독 검사를 의뢰했다. 3월 14일 정상치보다 훨씬 높은 수은과 유기용제 검출 결과가 나왔고, 주치의는 자신의 역량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해서 구로의원을 소개했다.
구로의원에서 상담활동하고 있던 김은혜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듣고 산재신청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시골에 있었으니 농약 때문이라고 산재 신청을 거부했다.
회사는 서울대병원 박희순 의사에게 회사에서 생긴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냐고 따졌다. 노동부 역시 뒷짐을 지고 있었다.
김은혜는 답답한 마음에 조영래 병호사 사무실에서 활동하고 있던 박석운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박석운은 법적인 절차로는 힘들다고 판단해서 기사화를 하기로 하고 동아일보 임채춘 기자를 찾았다.
그리고 5월 11일 동아일보가 보도를 하면서 뒤따라 여러 매체에서 협성계공의 열악한 작업 현장의 폭로가 이어졌다.
당시 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노태우 정부였기 때문에 수은 중독 사건이 급속도로 퍼져 나가는 것을 막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문군에 대한 산재를 인정했다. 하지만 문군은 사늘한 시신이 돼버렸다.
장례를 치러야 한다
곧바로 노동계에서는 장례투쟁위원회가 꾸려졌고, 노동자, 활동가, 의료인들이 결합했다. 그러면서 노동부 서울남부지방사무소장 구속과 노동부 장관 해임을 요구했다. 올림픽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부는 남부지방사무소장에게 경고처분을 내렸고, 사측은 공개사과와 보상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결국 남부지방사무소장을 직위해제했으며 철저한 산업안전보건대책 마련을 약속했다. 그제야 문군은 모란공원에 묻힐 수 있었다.
그해 KBS에서는 ‘송면이의 서울행’이라는 드라마를 방영했다. 당시 노태우 정권 초기였고, 올림픽 행사가 있었기 때문에 문송면군의 이야기를 다룬 논픽션 드라마가 방영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공식적인 반대는 없었지만 KBS 곳곳에서 “그거 안 할 수 없어? 꼭 해야 돼?”라는 식의 말을 들었다고 당시 제작에 참여했던 PD가 훗날 고백하기도 했다.
해당 드라마가 방송된 이후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나라 노동계의 현실을 원진 레이온 사태와 더불어 세상에 알리게 됐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