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2023년 맞이해서 곳곳에서 떡국으로 오찬을 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1일 윤석열 대통령은 참모진과 함께 떡국으로 오찬을 했다.
또한 각종 기업체에서는 떡국 나눔 봉사를 하는 등 새해를 맞이해 떡국 나눔 봉사 소식도 들린다. 떡국은 새해를 맞이한 우리에게는 중요한 음식으로 취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꿩 대신 닭
우리나라 사람들은 설날 아침이면 떡국을 만들어 먹었다. 떡국을 먹은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래떡처럼 장수하라는 의미가 있다. 또한 모양이 엽전 모양이기 때문에 부자가 되라는 의미도 있었다. 아울러 가래떡이 희고 길어 순수함과 밝음을 상징한다.
떡국이 언제부터 먹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은 없다. 조선 헌종 15년(1849년)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떡국을 ‘백탕(白湯)’ 혹은 ‘병탕(餠湯)’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즉, 떡의 모양이 희다고 하여 ‘백탕’, 떡을 넣고 끓인 탕이라 하여 ‘병탕’(떡 병(餠))이라 했다.
다만 떡국의 유래는 고대부터 있었다는 것이 정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가래떡을 만드는 방식이 현대와는 완전히 다르다.
현재는 방앗간 기계에서 가래떡을 뽑아내지만 기계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남자들이 떡매로 떡을 쳐서 가래떡을 만들었다.
그리고 떡국의 육수는 ‘꿩고기’를 사용했다. 꿩고기를 사용한 이유는 매사냥이 보편화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매사냥이 점차 사라지면서 닭고기를 사용했다. 이때부터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나왔다.
꿩고기를 사용했던 또 다른 이유는 조선시대는 소고기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는 농경사회이기 때문에 소를 도축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떡국의 보편화
떡국이 보편화된 것은 방앗간이 보편화됐기 때문이다. 마을마다 방앗간이 생겨나고, 가래떡을 만드는 기계가 보편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떡국도 보편화가 됐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에는 쌀은 공출의 대상이 됐기 때문에 쌀로 가래떡을 만들어 먹을 수 없었다. 이때 일제는 방앗간에서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만 들려도 고발의 대상이 됐다고 박완서 작가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미군정에서 밀가루가 보급되면서 사람들은 떡국의 떡을 쌀이 아닌 밀가루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한때 밀가루 떡국을 만들어 먹었지만 점차 쌀이 풍족해지면서 쌀가루 떡으로 떡국을 만들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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