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구대 암각화서부터
고래잡이 본격화는 서구열강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고래잡이가 본격화된 것은 오히려 강화도조약 이후 서구 열강이 밀려들어오면서이다. 근대적인 포경사업을 제안한 사람은 김옥균이었다. 1882년 일본에 수신사 일원으로 따라갔던 김옥균은 나가사키에서 일본 포경 산업을 보고 1883년 고종으로부터 동남제도개척사 겸 포경사로 임명받아 울릉도 개척 및 포경 산업 전반을 관할하게 됐다. 김옥균이 이 같은 직책을 맡은 것은 근대화 과정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려고 하는 의도였다. 하지만 1884년 갑신정변으로 김옥균 세력이 축출됐다. 이후 조선 포경업은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전이 된 이후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포경업은 일본인들이 독점을 하게 됐다. 포경선 선적은 모두 일본에 있었고, 단지 조선의 항구에서 출어를 할 뿐이었다. 즉, 조선 포경선은 아예 없었다.해방 이후
해방이 된 이후 일본인이 물러가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포경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영세했다. 이후 포경선 척수도 감소하면서 더 이상 포경선 건조가 되지 않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포경업에 뛰어든 것은 일본으로서의 수출 때문이다. 1970년대 당시 일본은 한국산 고래를 상당히 좋아하면서 인기가 있었다. 이후 포경산업은 점차 사양산업이 됐다. 고래잡이에 대한 전세계적인 비판 여론 등으로 인해 사양산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고래잡이 금지를 하게 됐고, 고래가 우연히 혼획된다면 불법포경인지 여부를 해경의 조사를 받은 후 울산의 고래고기 식당에 내보낼 정도가 됐다. 현재에도 매년 2천여 마리 정도가 혼획될 정도이다. 다만 울산광역시 등에서는 고래를 컨셉으로 관광상품을 만들었고, 울산고래축제를 매년 기획하고 있을 정도이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