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상반기부터 급등하는 원유값
이란혁명이 발발하면서 그에 따라 이란이 석유 생산량이 급감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그 다음해인 1979년 원유 도입값의 상승으로 이어졌다. 이에 1979년 하반기 들어서 오일 쇼크 조짐이 보였다. 당시 선진국은 큰 영향 없이 지나간 편이었지만 우리나라가 유독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것은 중화학공업에 치중을 했기 때문이다. 원래 장면 정권의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주로 소비재 생산에 초점을 맞춰서 경제성장을 이루려고 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소비재 생산이 아닌 중화학공업에 초점을 맞춰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중화학공업은 결국 석유와도 맞물릴 수밖에 없는 경제 구조를 만들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오일쇼크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1978년 물가상승률이 14%에서 1979년 18%로 급상승했다. 이는 설비 투자 증가율을 꺾게 만들었다. 이는 파산과 해고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1979년 8.7%의 경제성장률을 보였지만 1980년 1분기 전후 역성장인 -1.6%, 물가상승률 29%라는 기록적인 기록을 남기게 됐다. 이런 경제적 시련은 서민들에게는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기 충분했다. 우리나라가 경제개발을 한 이래 이만큼 힘든 시기가 없었다.부마 항쟁으로
이런 힘든 시기는 결국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석유 비용의 상승은 기업에게는 압박이 됐다. 인건비를 줄이거나 고용을 축소시켜야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하지만 인건비는 이미 상승할 때로 상승하고, 고용을 축소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고용주는 결국 ‘파산’을 선택했다. 노동집약적 산업이 가장 많이 있었던 지역이 바로 부산과 마산이었다. 이런 이유로 부마항쟁이 김영삼 총재의 제명 사건도 있었지만 이런 경제적인 상황도 맞물려 돌아갔고, 이런 정치적 불안은 결국 10.26 사건으로 이어졌다.2차 오일쇼크가 안정화되자
2차 오일쇼크는 1980년대 초반이 되면서 점차 안정화의 길을 걷게 됐다. 그러면서 국민들은 보다 안전자산에 투자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오일쇼크가 와도 끄떡없는 그런 자산에 투자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결국 부동산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강남 개발과 연결되면서 강남불패의 신화에 신호탄을 쏘게 됐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