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 500여명 학살
해당 학살은 민간인들이 대략 500여명 정도 가량 희생됐다. 미군 측은 347명, 베트남 측은 504명으로 집계했다. 하지만 희생자 상당수는 여성, 어린이 그리고 아기(학살된 3세 이하 아기가 50명)였다. 한 마디로 비전투요원인 민간인을 상대로 미군이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22명의 미군이 전쟁범죄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됐지만 윌리엄 캘리 중위만 ‘종신형’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그 마저도 감형되면서 종신형이 해제됐다. 학살을 저지른 미국 육군 제23보병사단 11여단 20보병연대 1대대 C중대는 전선에 투입된지 4달 밖에 되지 않았는데 중대원 5명이 전사하는 상황이 전개됐다. 미라이 마을을 진입하기 전에 해당 마을을 핑크빌(Pinkville)이라고 불렀다. 베트콩 동조자들로 의심되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3월 15일 반격명령을 받은 20보병연대 1대대는 A와 B 중대는 미라이 마을을 포위하고 C중대가 마을을 진입했다. 그리고 베트콩 및 동조자로 의심되는 사람은 모조리 사살 및 체포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문제의 그날
3월 16일 C중대가 미라이 마을로 진입했다. 하지만 베트콩 및 동조자들은 이미 도망간 상태이다. 하지만 미군은 남아 있는 사람들을 모두 끌어냈다. 그리고 학살이 시작됐다. 군인들은 눈에 띄는 사람들을 성별, 나이 상관없이 무차별적으로 학살을 했다. 단지 학살만이 아니라 성폭행 등이 동반됐다. 그리고 상부에 보고하기를 ‘도망치는 적군 사살’로 처리했다. 훗날 학살 장면이 워낙 끔찍해서 조사하는 사람들도 치를 떨었다고 할 정도였다. 당시 미 육군 항공대 OH-23 정찰 헬리콥터를 조종하던 미군은 민간인 학살 현장을 목격하고 경악해 하면서 생존한 민간인 구출을 단행했다. 그 과정 속에서 C 중대와 격렬한 싸움을 했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총기로 C 중대와 대치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형 헬기였기 때문에 민간인을 구출하는데 한계가 있었다.1년이 지난 후에
미라이 학살은 엄격한 통제로 철저히 은폐됐다. 하지만 사진기자 로널드 해벌은 해당 학살 장면이 담긴 사진을 1969년 잡지를 통해 공개했다. 그러면서 여론이 들끓었고, 결국 미군은 조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솜방망이 처벌로 끝났다. 해당 사건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베트남 전쟁 반대 여론이 확산됐다. 그리고 북베트남은 반미 정서를 자극하는 용도로 적극 활용했다. 그러면서 베트남 국민 상당수가 베트콩으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미국은 자유 베트남을 지키기 위해 참전했지만 해당 사건으로 인해 명분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러면서 결국 반전 여론에 의해 미군은 베트남에서 철군을 하게 됐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