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00년 7월 5일은 한강철교가 준공된 날이다. 한강철교는 한강 이북과 한강 이남을 연결한 철도로 경부선의 한 축을 담당했다.
한강철교의 준공은 한강 이북의 물자와 한강 이남의 물자가 활발하게 교류를 하게 만들었으며, 역사의 한편을 담당했다.
모스가 부설권 획득했지만
한강철교 부설권은 미국인 제임스 모스가 경인선 건설과 함께 획득했다. 보행자의 편의를 위해 보도 전용 다리를 함께 건설하려고 했다.
이에 1897년 3월 29일 기공식을 열었다. 하지만 자금난과 인력난 등으로 모스는 부설권을 일본에 넘겼다. 일본은 공사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로 보도 전용 다리는 부설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차량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경제적인 면에서 비용 대비 효율이 크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즉, 철교를 건설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인력과 물자의 이동이 가능했다고 판단했다. 다만 보행용 다리는 ‘한강대교’가 건설되면서 해결됐다.
1900년 7월 5일 단손으로 개통되면서 교통량이 늘어났고, 이에 1912년 상류 쪽에 단선 철교를 하나 더 놓게 됐다. 일제강점기 당시 열차 운행이 늘어나면서 복선 철교를 하류 쪽에 하나 더 놓게 됐다.
한국전쟁 당시 폭파
1950년 6월 28일 6.25 전쟁이 터지고 서울이 함락될 위기에 놓이게 되자 북한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이승만 정부는 한강 인도교는 물론 한강철교를 폭파했다.
하지만 한강철교는 약간 파손만 입었을 뿐이었다. 이에 북한군은 복구를 한 후 남하를 했다. 그 이후 한강철교는 계속 목표물이 되면서 많은 부분이 파괴됐다.
이후 서울을 탈환한 다음 1951년 미 육군 공병대인 미군 제62공병단에 의해 A선만 임시복구, 열차가 임시로 통행하게 됐다.
한국전쟁 끝난 이후 복구가 시작됐으며 경제성장이 이뤄지면서 노선은 증가하게 됐다. 하지만 노후화가 진행되면서 철거를 하게 됐고, 현재는 아무런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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