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여수·순천 10·19 사건
[역사속 오늘리뷰] 여수·순천 10·19 사건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10.19 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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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여수시청
사진=여수시청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48년 10월 19일은 여수에 주둔 중이던 조선국경경비대 14연대 소속 장병들이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출병 명령을 거부하고, 여수와 순천 일대 남로당 당원들과 합세해 일으킨 반란인 여수·순천 10.19 사건이 발발한 날이다. 한때 ‘여순 반란’으로 불렸지만 여수와 순천의 주민들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여수와 순천에 주둔 중이던 군대가 일으킨 사건이기 때문에 ‘여순반란’은 정확한 명칭이 아니다. 오히려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이라고 해야 맞는 이야기다. 그리고 해당 사건을 계기로 군대 내 숙군 작업이 벌어졌고, 그 숙군 작업에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4.3 사건 진압 명령 떨어지자

해방 정국 군에는 3개의 좌파 조직이 있었는데 남로당 중앙당에서 직접 관할하는 장교들의 조직인 ‘콤 서클’, 남로당 지방 도당에서 관할하는 병사들의 조직인 ‘병사 소비에트’, 마지막으로 남로당을 견제하기 위해 북로당(북한 조선로동당의 전신)이 경상남도 일대에 조직한 ‘인민혁명군’ 등이다. 그리고 이들의 총책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여순사건의 주역인 지창수 하사는 ‘병사 소비에트’에 소속돼 있었고, 김지회 중위는 북한의 평양학원 대남반 출신 공작원으로, 지령을 받고 남파되어 국방경비사관학교 3기에 입교한 북측 공작원이다. 남로당은 당원들에게 비밀지시를 내려 군대에 입대시키는 것을 독려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제주 4.3사건의 소요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남로당 계열 1개 대대 장병들이 명령을 거부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된 이후

여순 사건이 진압되자 이승만 정부는 반공노선을 더욱 강화했다. 이에 그해 12월 국가보안법이 통과됐다. 그리고 이듬해 군부 내 숙군이 본격화됐다. 그것은 군부 내 일본군 출신이 득세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방 이후 군대가 창설되면서 군대 내 세력은 크게 3분파로 나눠졌다. 하나는 광복군 출신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남로당 당원 출신의 좌파 계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일본군 출신이다. 광복군 출신이 워낙 소수이기 때문에 남로당 출신 좌파 계열과 일본군 출신의 알력다툼이 상당했다. 하지만 여순 사건을 계기로 남로당 출신 좌파 폐열에 대한 숙군 작업이 벌어지면서 일본군 출신이 군부 내 주요 요직을 독차지 했다. 그리고 남로당 출신 좌파 계열에 대한 숙군을 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남로당 소속 박정희 전 대통령 때문이었다. 한때 남로당 소속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지만 숙군 작업에 상당한 도움을 줌으로서 일본군 출신이 군부 내 주요 요직을 독차지할 수 있게 했고, 그것이 5.16 군사반란의 토양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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