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제조업체 ‘아사히공예’부터
코오롱은 이원만 창업주가 1935년 일본 오사카에서 모자 제조업체 ‘아사히공예(주)’를 세운 것에서 출발했다. 1937년 아사히피복사도 세웠다. 그리고 1951년 도쿄에 삼경물산을 세웠고, 1953년 우리나라에 나일론을 독점 공급했다. 1954년 귀국, 나일론 유통업체 ‘개명상사’를 세우면서 본격적인 그룹 운영에 들어갔다. 1957년 대구에 한국나일롱(주)를 세워 국내 생산을 시작했고, 1960년 이원만 창업주 장남 이동찬 회장이 개명상사 사장에 취임했다. 1963년 한국나일롱은 국내 기업 최초로 나일론을 해외에 수출했고, 1964년 개명상사와 한국삼경물산이 통합해 ‘삼경물산(주)로 유통업무를 일원화시켰고, 1968년 나일론 제품의 판매와 유통을 전담하는 코오롱상사(주)와 한국염공을 세웠다. 1969년 한국포리에스텔(주), 1972년 한국부직포공업(주), 1976년 종합화학회사인 코오롱유화(주) 등을 세우면서 섬유 기업집단이 됐다. 1971년 삼경국제관광을 세워 서비스 사업에 진출을 했고, 1977년 이원만 회장은 명예회장으로 이동찬 한국나일롱 사장이 그룹 회장으로 승진하면서 2세 경영체제로 전환했다. 1981년 (주)코오롱으로 일원화했고, 1983년 고려나일론과 삼영신약까지 인수했다. 그리고 1985년 한국바이린을 분가시켰고, 1988년 국내 수입차 시장이 개방되면서 코오롱상사를 통해 수입차 판매를 시작했다. 같은 해 코오롱고속관광을 분가시켰고, 1989년 미국 메트로폴리탄 라이프와 합작을 해서 코오롱메트생명을 세웠다. 1996년 이동찬 회장 장남 이웅열이 그룹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3세 경영시대를 여는 듯 했다.이웅열 시대에 접어들면서
하지만 그 다음해인 1997년 IMF가 발생하면서 1998년 구조조정에 나서면서 코오롱메트생명보험과 코오롱전자를 각각 매각했다. 이로 인해 대기업 지정 취소가 논의될 만큼 위세는 대폭 줄어들었다. 이때 코오롱은 이동통신사업을 접어야 했다. 더욱이 2004년 473억원의 코오롱캐피탈 횡령 사건이 발생하면서 증권가에서는 코오롱 자금난 소문이 들리기도 했다. 또한 부도설까지 나돌았다. 다만 2004년 말부터 화섬산업의 구조조정을 시작으로 안정화의 길에 접어들었다. 다만 코오롱 구미 공장의 근로자를 희망퇴직 및 정리해고 형식으로 감원하면서 근로자의 반발이 거세졌고, 2006년 6월 해고 근로자들이 이웅열 당시 회장의 자택에서 정리해고분쇄투쟁결의대회까지 벌이기도 했다.마우나리조트 붕괴사고부터 인보사 사태까지
2014년에는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사고가 발생하면서 그룹 이미지가 크게 실추될 뻔했지만 빠른 사과와 보상급 지급 관련 합의가 이뤄지면서 오히려 코오롱에 대한 이미지 개선이 크게 되기도 했다. 인보사 사태로 인해서 소액주주들에게 4000억 규모의 피소를 당하면서 이웅열 명예회장은 출국금지 되기도 했었다. 그리고 인보사 사태의 소송은 현재진행형이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