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달라
장미하면 여성 인권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1908년 3월 8일 미국 뉴욕에 모인 1만 5천여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달라”고 외친 구호 때문이다. 당시 여성 노동자들은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에 반발하면서 근로여건 개선과 참정권 보장 등을 요구했고, 이날 벌인 대규모 시위가 세계여성의 날의 유래가 됐다. 이때 ‘빵’과 ‘장미’는 세계 여성의 날의 상징이 됐다. 빵은 남성과 비교해 저임금에 시달린 여성들의 생존권을, 장미는 참정권을 뜻했다. 미국 여성 노동자들은 하루 12~14시간씩 일해야 했고, 선거권과 노동조합 결성 자유 등이 부여받지 못했다. 이런 부당성에 봉기했고, 그것이 1910년 ‘의류노동자연합’ 창설로 이어졌다. 여성은 현대 이전까지만 해도 참정권이 없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여성의 정치 참여는 없었다. 여성의 참정권 운동은 19세기 말엽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여성의 사회참여가 늘어나면서이다. 산업혁명이 이뤄지면서 여성이 공장 근로자로 일을 하면서 점차 여성의 참정권에 대한 것도 눈을 뜨기 시작했다.여성 참정권 상징 장미
하지만 그때에도 여성의 참정권이 부여되지 못했다. 현존하는 독립국 중 처음으로 여성 참정권을 허용한 나라는 뉴질랜드이다. 1994년 여성들도 참정권을 쟁취했고, 이어 호주 의회가 1902년 여성 참정권 법을 통과시켰다. 핀란드(당시 러시아 제국 치하 핀란드 대공국)는 1906년 선거법을 제정했고, 1907년에 19인의 여성 의원이 선출됐다. 영국은 1907년 여성 피선거권을 보장하는 법을 제정하면서 1918년 여성의 참정권이 허용됐다. 그러면서 미국으로 이 소식이 넘어가면서 1908년 3월 8일 여성의 참정권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나면서 ‘빵’과 ‘장미’를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장미를 달라고 한 것은 서양에는 여성의 이름으로 ‘장미’와 관련된 이름이 많았기 때문이다. 즉, 장미를 달라는 것은 여성으로서 정치적 참여를 요구한 것이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