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와 가톨릭의 갈등 심화
16세기 유럽은 종교개혁으로 인해 개신교와 가톨릭 간의 갈등이 심화됐다. 예수회는 이런 가톨릭의 위기에서 탄생됐다. 이냐시오는 군인으로 활동하다가 부상을 입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깊은 신앙체험을 했고, 가톨릭에 몰입하게 됐다. 군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군인제도를 모방한 엄격한 규율을 중심으로 양성됐다. 또한 스페인 왕실의 비호를 받으면서 스페인 가톨릭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스페인이 대항해시대를 열면서 예수회는 아메리카와 아시아 현지의 선교를 담당했다. 특히 예수회 소속 사람들이 보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인물들이기 때문에 유럽의 지식을 아메리카와 아시아에 전파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이냐시오 본인이 귀족 자제로 교육을 받은 엘리트였고, 예수회 내부에서도 엘리트 교육을 했다. 이런 이유로 아메리카와 아시아 등에서 짧은 시간에 빠르게 가톨릭을 전파할 수 있었다. 다만 예수회는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국력이 쇠퇴하면서 약화됐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라틴아메리카를 중심으로 예수회는 지금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포르투칼의 아시아 진출
포르투칼이 아시아로 진출을 하면서 예수회가 아시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예수회는 엄격한 조직이었지만 현지 전통문화에 대한 무조건 비판 등을 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동아시아의 제사 문화 등을 허용하기도 했다. 즉, 현지인의 사상을 ‘그리스도교적’으로 바꾸는데 집중했다. 이런 이유로 ‘여호와’를 ‘천주(天主)’ 즉 하늘의 주인으로 바꾸면서 동아시아에서는 가톨릭을 ‘천주교’라고 부르게 했다. 천주는 동아시아에서는 오래된 사상이었기 때문에 여호와를 천주로 둔갑한 것이다. 또한 예수회 선교사는 명나라 황제의 관료로 활동하면서 중국인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중국어와 유교 사상을 익혔다. 그러면서 서구 문물을 중국 상류층에 소개를 했고, 그러면서 중국의 가톨릭화를 시도했다.우리나라에서는
사실 우리나라는 예수회와 직접적인 교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말 역사를 바꾼 사건의 중심에 예수회가 있었다. 서양 과학기술 및 천주교 관련 책들은 명나라 또는 청나라의 사신으로 간 사람들에 의해 한반도로 전파됐다. 또한 소현세자가 아담 샬 신부와 교류를 했다는 것이 전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와 18세기를 거치면서 천주교가 조선땅에 전파됐다. 그러면서 스스로 교회조직을 만들고 사제를 요청하고 많은 순교자들의 피를 흘리게 됐다. 만약 예수회가 본격적으로 선교사를 한반도에 파견했다면 우리나라 근대화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